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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 제가 독자님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허훈, 허겸, 허위 세 형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삼 형제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는데요. 맏형 허훈 선생은 군자금 지원과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셋째 허겸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넷째 허위 선생은 의병을 이끌어 항일전을 지휘하는 등 세 형제가 모두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도와주고 지지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는데요, 세 형제의 숭고한 애국정신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허위의 영정사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세 형제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1836년 4월 14일, 세 형제의 맏이인 허훈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 년 뒤인 1851년 10월 23일에 셋째인 허겸 선생이, 1854년 4월 1일 막내 허위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둘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첫째 허훈 선생

 

삼형제 중 맏이였던 첫째 허훈 선생은 구한말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이와 동시에 의병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었습니다. 허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막내 허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동생을 지지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요. 그는 허위 선생에게 토지 3,000여 두락을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습니다. 보통 논의 경우에는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이라고 한다니 3,000여 두락은 현재로 따지면 60~90만 평 정도로,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또한, 허훈 선생은 1896년에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영해·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선생은 1907년 8월 23일 영면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셋째 허겸 선생

 

셋째 허겸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는데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허겸 선생은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맏형과 막내를 모두 여읜 허겸 선생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김동삼, 유인식 등과 함께 중어학원을 개설하고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허겸 선생은 부민단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는데요. 부민단에서 애족ㆍ구국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선생은 민생 교육과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9년 10월 21일, 중국 길림성의 주하현 하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하였습니다.

 

# 막내 허위 선생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반포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전국적인 봉기 상황에 자극받은 허위 선생도 구국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는데요.

허위 선생은 의병을 규합하여 1896년 3월 26일,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 의병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허위 선생의 나이 42세 되던 해의 일이었으며, 이 의진은 ‘김산의병’이라고 불렸습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후 전국 각지에 파견된 채두관(머리를 짧게 자르는 관리)이

거리를 지나는 행인을 잡아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모습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친 허위 선생의 의진은 이를 격파하기 위해 소집된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은 쉽게 물리쳤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병을 일으키고 난 직후, 아직 전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를 직면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졌던 것인데요. 이어 경성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 등 의진의 주요 인물을 체포해 갔습니다. 허위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는데요. 아쉽게도 이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진을 해산하였습니다. 당시 허위 선생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의진 해산 이후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전념하던 허위 선생은 1899년 신기선의 천거에 의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은 성균관 박사, 1904년 8월에는 평리원 서리재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직책은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자리로, 허위 선생은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아 온 선생은 장지연과의 교류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한국 침략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허위 선생은 전 국민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배일통문’을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어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반박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귀향 조치된 허위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선생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거병하였습니다.

허위 선생은 1907년 11월에 13도창의군을 조직하는 것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말에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아쉽게 실패로 끝난 작전이었지만 전국에서 모인 여러 의병 부대가 하나로 뭉쳐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큰 의의가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일제의 이권 침탈 중지 등을 위해 항일전을 계속하던 허위 선생은 1908년 6월 11일에 일제에 체포되어, 이후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1908년 9월 27일, 형 집행에 앞서 일본의 승려가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이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허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는데요. 허위 선생의 독립을 향한 기개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08년 5월 22일 경성헌병대에 갇혀서 쓴 허위 선생의 유묵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은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세 형제와 같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 선생의 가문의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허훈ㆍ허겸ㆍ허위 선생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명문대가입니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구미향토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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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구한말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인물, 신돌석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내일 6월 13일(화)은 신돌석 장군 순국 109주기인데요. 평민 출신에 젊은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많은 공적을 세웠던 신돌석 장군의 일대기, 함께 살펴보시죠!



신돌석 의병장은 경북 영해군(지금의 영덕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의 후예이지만 영해에서 그의 문중은 서리, 즉 중인 집안이었고 그의 집은 아전에서도 밀려나 갓도 쓸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신돌석 장군은 마을 서당에서 글을 익히며 학문을 익혔습니다.


▲ 신돌석 의병장의 복원 생가(출처: 독립기념관)


▲ 명성황후 국장 장면(출처: 독립기념관)


1895년 일본군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 등으로 국민들의 대일 감정이 극에 달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발발합니다. 이듬해 신돌석 장군 역시 19세의 젊은 나이로 100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결국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습니다.


▲ 단발령 지령문 (출처: 독립기념관)



그는 이때 남한산성에서 용맹을 떨친 김하락 의진이 경주를 거쳐 7월 초 영덕방면으로 이동해오자 이들과의 연합작전을 벌였습니다. 또한 유시연의 안동의진과도 합세하여 대규모 연합의진을 형성했습니다. 이들 연합의진은 김하락 의병장의 주도 아래 영덕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14일 영덕에 도착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해왔고 신돌석 의병장과 김하락 의병장 등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하여 격전을 치르게 됩니다. 적병이 물러가자 신돌석 의진은 지역 백성들의 큰 지지를 받았고, 많은 이들이 의병을 자처하며 그의 의진에 합류했습니다. 인근 일대에 그의 명성이 크게 떨쳐 군사는 무려 3,000여명에 달했습니다. 그는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진보의 삼위에서 또다시 적을 격파하는데 성공합니다.


1907년 11월, 의병장 이인영을 중심으로 13도 의병이 연합해 서울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전국의 의병부대는 양주로 집결했죠. 이 때 신돌석 의병장도 경상도 의병을 대표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올라왔습니다. 그는 교남의병 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13도연합의병의 서울 침공계획은 지도력의 미흡과 부실한 계획, 의병 재편 과정에서의 마찰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였는데요.


당시 13도연합의병부대의 각도 의병장들은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위정척사 사상을 전개한 양반, 유생 출신으로만 편성되어 있었는데요. 의병장으로서 용맹을 떨치기는 하였지만 평민 출신이었던  신돌석 장군을 비롯하여 백제, 홍범도, 김수민 등 각처에서 용맹을 드날리던 천민 의병장들도 의병 연합에 배제되는 등 갖가지 문제점이 불거졌습니다. 이와 같은 한계성 때문에 서울 공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신돌석장군 유적지 정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소재)


1908년 신돌석 의진은 고향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그는 평해로 들어가 독곡의 일군을 섬멸하고 2월에는 영양읍에 주둔하며 의병의 기세를 불려나갔습니다. 그러나 엄동으로 인해 의병 활동에 지장이 생기자 나중의 거병을 기약하고 의진을 해산시켰습니다. 일제는 무력으로 신돌석 장군을 제압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유책으로 끊임없이 도장관의 맹서와 통감의 편지 등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신돌석 장군은 한치의 망설임 없이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의병을 해산시킨 이후 신돌석 장군은 가족들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영덕으로 이동합니다.


그가 영덕 눌곡에 이르렀을 때, 길에서 우연히 옛 부하 김상렬을 만나게 됩니다. 김상렬의 간청으로  투숙하며 은신하던 신돌석 장군은, 그의 현상금에 눈이 먼 김상렬의 형제들에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 참담한 소식을 들은 지방민들은 모두 통곡하며 슬퍼했다고 전해집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 신돌석 의병장 유허비(경북 영덕군 소재, 출처: 독립기념관)

 

신돌석 의병장의 활약상은 일제 치하 속 양반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던 의병활동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당시의 신분차별 의식을 극복하고 국가의 위기를 구하고자 뛰어든 민중들의 삶을 대변했다고도 볼 수 있겠는데요. 


오는 6월 13일 화요일 오전 11시, 신돌석 장군 순국 109주기를 맞아 경북 영덕군 축산면의 신돌석 장군 유적지에서 추모행사가 열립니다. 국난의 역사 속에서 우리 민족의 희망이 되었던 신돌석 의병장의 빛나는 애국심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 참고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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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독립운동가 김석진(金奭鎭)선생
(1843. 1. 21 ~ 1910. 9. 8.)
  

2012년 2월의 독립운동가는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고, 경술국치 당시 일제작위 수여를 거절하고 병탄에 항거하여 음독 자결한 김석진 선생입니다.

선생의 호는 오천(梧泉)이며,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860년 정시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성균관, 규장각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호조판서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1984년 이후 일제의 침탈과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겪고 "을미년의 변고에 하찮은 목숨을 버리지 못하였을 망정 어찌 차마 벼슬길을 찾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염양리로 낙향하여「사안당(思安堂)」을 짓고 와신상담하며 은거하였습니다. 매일 의기를 참지 못하고 격앙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와 제2차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포츠머스조약 등을 통해 서양 열강으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용인 받고, 1905년 11월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습니다. 이에 비분강개한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선 등의 지사들이 자결․순국하였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홍만식은 김석진과 함께 시류를 논하였었고, 민영환과 조병세 등은 국정을 함께하였던 관료였습니다.
선생도 즉각 서울로 올라와 '을사토역소(乙巳討逆疏)를 내어 늑약에 찬성한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5적을 처단할 것과 각 공관에 성명을 내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할 것을 상소하는 등 강경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하는 등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기반을 강화하고 1910년 8월 29일 강제로 병탄하였습니다. 나아가 식민지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귀족령’을 만들어 선생 등 고위 관료와 명망 있는 지도자 76명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금(金)을 주어 회유하고자 하였습니다.
 
선생은 이러한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작위수여 등 일체를 거절하고 1910년 9월 8일 서울 오현(현, 서울특별시 강북구 번동 북서울 꿈의 숲 공원 내)에 있는 조부모 묘소의 재실인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에서 음독 자결하였습니다.

선생이 순국한 창녕위궁재사(昌寧尉宮齋舍, 서울시 강북구 번동 소재 전통한옥)



한말의병장 유인석은 당시 일제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의병봉기’와 ‘은둔 또는 망명’, ‘자정수지(自靖遂志:자결)’ 세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선생은 ‘은둔과 자결’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김석진 선생의 호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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