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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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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 밖에 없다.”


▲ 이근주 선생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분은 나라를 잃은 통분에 자결하여 순국한 충남 홍성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근주 선생입니다. 이근주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하자 자결로 항거한 분입니다. 


1860년 2월 3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근주 선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에 항거하여 일어난 홍주의병에 김복한, 안병찬 등과 함께 참여하였습니다.


▲ 1906년 5월 30, 31일 홍주성전투 중에

일본군에 의해 희생된 홍주의병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홍주의사총

(출처: 국가보훈처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홍주 소재)


그러나 김복한 등 주도자들이 체포된 뒤, 조의현 등과 재기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울분에 쌓인 선생은 천식과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얻고 말았습니다.


▲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했던

민영환 선생의 모습(고종의 외사촌 동생)

(출처: 위키백과)


또한, 선생은 여러 항일 사적을 편찬하였는데요. 홍주의병 과정을 기록한 「을미록」, 나라가 매군매국(賣君賣國)의 무리에 의해 더럽혀짐을 한탄한 「절의가」, 민영환 선생의 순국을 기린 혈죽시 등 여러 항일 기록들을 남겼습니다.


▲ 조선 총독부의 모습 (출처: Musty Room 블로그)


1910년 8월 경술국치의 비보를 접한 이근주 선생은 “국운이 다하였으며 성인의 도가 끊어져 살아갈 마음이 없다.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긴 것은 너무나 분통하고 부끄럽고 또 싫어서 죽을 수밖에 없다.”며, 자결을 결심하게 됩니다.


▲ 이근주 선생 묘소 사진


이후 1910년 9월, 이근주 선생은 큰형의 환갑이 지난 뒤 부모의 묘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자결ㆍ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이근주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1월, 점점 겨울이 찾아오는 쌀쌀한 날씨가 마음을 더욱 시리게 하는데요. 이근주 선생의 애국심과 망국의 슬픔에 베인 한을 기리며 마음 속 깊이 새기는 한 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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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오늘 제가 독자님께 소개해드리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허훈, 허겸, 허위 세 형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삼 형제가 모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웠는데요. 맏형 허훈 선생은 군자금 지원과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셋째 허겸 선생은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넷째 허위 선생은 의병을 이끌어 항일전을 지휘하는 등 세 형제가 모두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구한말, 국운이 기울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도와주고 지지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는데요, 세 형제의 숭고한 애국정신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허위의 영정사진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세 형제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진사인 허조이며 모친은 진성 이씨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1836년 4월 14일, 세 형제의 맏이인 허훈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10여 년 뒤인 1851년 10월 23일에 셋째인 허겸 선생이, 1854년 4월 1일 막내 허위 선생이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둘째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 첫째 허훈 선생

 

삼형제 중 맏이였던 첫째 허훈 선생은 구한말 당대에 문명을 크게 떨친 대학자였으며, 이와 동시에 의병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협조한 인물이었습니다. 허훈 선생은 1895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막내 허위 선생이 의병을 일으키자, 동생을 지지하여 물심양면으로 도왔는데요. 그는 허위 선생에게 토지 3,000여 두락을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제공하였습니다. 보통 논의 경우에는 200평, 밭은 300평을 한 두락이라고 한다니 3,000여 두락은 현재로 따지면 60~90만 평 정도로, 그야말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또한, 허훈 선생은 1896년에 진보(眞寶)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안동·영해·영양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선생은 1907년 8월 23일 영면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셋째 허겸 선생

 

셋째 허겸 선생은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습니다. 또한, 을사늑약 체결에 찬성했던 을사오적의 암살을 꾀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는데요.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허겸 선생은 동지 4백여 명을 규합하여 경기도 연천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맏형과 막내를 모두 여읜 허겸 선생은 가족을 잃은 슬픔을 뒤로 한 채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김동삼, 유인식 등과 함께 중어학원을 개설하고 한중 친선 및 한족의 이익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허겸 선생은 부민단을 조직하여 초대 단장에 취임하였는데요. 부민단에서 애족ㆍ구국운동 등의 사업을 전개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하였습니다. 선생은 민생 교육과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1939년 10월 21일, 중국 길림성의 주하현 하동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하였습니다.

 

# 막내 허위 선생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반포하자, 전국에서 항일 의병이 잇따라 일어났습니다. 이 당시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합니다. 전국적인 봉기 상황에 자극받은 허위 선생도 구국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는데요.

허위 선생은 의병을 규합하여 1896년 3월 26일, 김천 읍내에서 수백 명의 장정들을 모아놓고 항일 의병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허위 선생의 나이 42세 되던 해의 일이었으며, 이 의진은 ‘김산의병’이라고 불렸습니다.

 

 

▲단발령이 공포된 후 전국 각지에 파견된 채두관(머리를 짧게 자르는 관리)이

거리를 지나는 행인을 잡아 강제로 상투를 자르는 모습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친 허위 선생의 의진은 이를 격파하기 위해 소집된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은 쉽게 물리쳤으나,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의병을 일으키고 난 직후, 아직 전세가 완전히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적의 대공세를 직면하게 되어 의진이 쉽게 무너졌던 것인데요. 이어 경성과 공주의 관군이 합세하여 이은찬과 조동호 등 의진의 주요 인물을 체포해 갔습니다. 허위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상주 및 김산의 지사들과 함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충북 진천까지 진격해 들어갔는데요. 아쉽게도 이때,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임금의 밀지를 받고 의진을 해산하였습니다. 당시 허위 선생은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호남 삼월 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의진 해산 이후 맏형에게로 가서 학문에 전념하던 허위 선생은 1899년 신기선의 천거에 의해 중앙의 관계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은 성균관 박사, 1904년 8월에는 평리원 서리재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 직책은 오늘날의 대법원장서리에 해당하는 자리로, 허위 선생은 평리원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그 칭송이 자자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때까지 전통 유학을 학문의 기반으로 삼아 온 선생은 장지연과의 교류를 계기로 신학문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1904년 2월 일제는 한국 침략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도발하였고,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허위 선생은 전 국민이 일본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배일통문’을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이로 인해 선생은 일제 헌병대에 구금되어 항일투쟁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며 반박하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귀향 조치된 허위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선생은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연천, 적성, 철원 등지를 무대로 다시 거병하였습니다.

허위 선생은 1907년 11월에 13도창의군을 조직하는 것을 주도했으며 1908년 1월 말에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습니다. 아쉽게 실패로 끝난 작전이었지만 전국에서 모인 여러 의병 부대가 하나로 뭉쳐 서울 외곽까지 진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큰 의의가 있는 작전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광무황제의 복위, 외교권 회복, 통감부 철거, 그리고 일제의 이권 침탈 중지 등을 위해 항일전을 계속하던 허위 선생은 1908년 6월 11일에 일제에 체포되어, 이후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1908년 9월 27일, 형 집행에 앞서 일본의 승려가 명복을 빌기 위해 독경하려고 하자 선생은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 갈 것이요, 혹 지옥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서 복을 얻으랴” 라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이를 물리쳤다고 합니다. 허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 55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는데요. 허위 선생의 독립을 향한 기개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908년 5월 22일 경성헌병대에 갇혀서 쓴 허위 선생의 유묵

"나랏일이 여기에 이르니 죽지 아니하고 어찌하랴.

내가 지금 죽을 곳을 얻었은즉 너희 형제간에 와서 보도록 하라."

 

세 형제와 같이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있어, 우리는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6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을 한 이회영 선생의 가문의 이야기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허훈ㆍ허겸ㆍ허위 선생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정한 명문대가입니다. 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자료

국가보훈처 공훈록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구미향토문화대전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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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박지현

    2017.12.25 21: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과제 하는 데에 참고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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