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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통일·문화국가 건설. 백범 김구 선생님의 꿈은 늘 더 나은 조국이었습니다. 자신의 삶보다 조국을 더 사랑하셨고, 그토록 자신이 사랑하던 조국과 국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셨습니다. 


▲ 효창공원


▲ 효창공원 입구


이처럼 겨레의 큰 스승이자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선생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지난 6월 26일 오전 10시 30분, 서울의 백범김구기념관에서 68주기 추모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추모식에는 유족, 각계인사, 시민 등 약 400명의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습니다.


▲ 기념관 입구


▲ 기념관 내부


백범 김구 선생 68주기 추모식은 개식 선언에서부터 국민의례, 추모식사, 추모사, 추모가, 헌화 분향, 폐식 선언 순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식사


▲ 추모식장 전경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의 김형오 회장은 추모식사에서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구 선생님의 업적과 정신을 기렸고, 이어서 국가보훈처장(최완근 국가보훈처 차장 代讀)과 광복회장의 추모사가 진행되었습니다. 


▲ 추모가(숙명여대 합창단)


추모사 이후에 숙명여대 합창단에 의해 ‘백범 김구 선생 추도가’가 제창되었고, 이어 주요 인사들과 유가족, 숙명여대 학생대표 등에 의해 진행된 헌화 분향으로 백범 김구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국민들의 마음을 대표하며 백범 김구 선생님을 추모했습니다.



▲ 헌화(주요인사)


 

<백범 김구 선생 약전>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 가난한 집안의 독자로 출생

-1894년 황해도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하여 동학군의 선봉장 임무수행.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로 1896년 안악군 치하포에서 변복한 일본인 스치다를 처단하고, 체포되어 7월 인천감리영에 투옥.

-1905년 을사늑약 무효투쟁 등 국권회복운동 전개

-1908년 독립운동가들의 국내 최대 비밀 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안악사건, 105인 사건 등으로 총 17년형 언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를 활성화하기 위해 헌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켜 국내/외 큰 영향을 미침.

-1940년 충칭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활동 전개.

-1945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미·소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백범 김구 선생의 정신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계무대에서 자주적인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할까요? 백범 김구 선생이셨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 고민에서부터 더 나은 대한민국은 시작될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셨던 김구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백범 정신을 마음 속에 새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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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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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터 여러분은, 백범 김구 선생이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지방순회를 할 때 처음으로 찾았던 곳이 인천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나요? 이 이유에 대해 알아보던 중, 저는 인천에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 위치한 곳이라면, 김구 선생과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이 있는 인천시 장수동의 인천대공원만 생각했습니다.

  

▲ 인천 장수동 인천대공원 내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

  

하지만 현충시설에 대해 국가보훈처 홈페이지를 찾아보던 중, 인천시 부평구에 위치한 부평여자중학교에도 백범 김구 동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 부평여자중학교 내부

     

▲부평여자중학교 운동장에 위치한 신사임당 동상

  

운동장으로 들어서니, 제가 알고 있었던 백범 김구 동상 말고도, 신사임당 동상도 볼 수 있었습니다.

     

   

▲부평여자중학교 운동장에 위치한 김구 선생의 동상

   

백범 김구 선생은 1896년, 일본 군사 간첩을 죽인 ‘치하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그 해 5월 1일 새벽 해주감옥으로 붙잡혀 갔고, 7월 초에는 인천감옥으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리고 8월과 9월에 걸쳐서 모두 세 차례 신문을 마치고 수감 중이던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탈옥할 때까지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1898년 3월 9일 인천감리에서 탈옥하였다고 합니다. 그때는 인천의 지리조차도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용동마루턱과 천주교당 뾰족집, 그리고 화개동 마루턱과 북성고지 모래밭, 부평 등의 지명을 통해 자신의 탈옥 경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 후 백범 김구 선생은 1911년 ‘안명근 사건’과 ‘신민회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가 두 번째로 인천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인천 축항공사(인천항 제1부두)에 동원되어서 노역에 시달리다 1915년에 가출옥하였습니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이 고국에 돌아와 1946년 지방순회를 할 때 가장 먼저 찾았던 곳은 인천이었습니다. 또한 인천의 강화도는 김구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탈옥을 권유하였고, 전 재산을 털어 구명운동을 벌였던 김주경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이런 뜻깊은 인연으로 인해 인천시는 김구 선생의 겨레 사랑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학교 안은 학생들이 다들 귀가한 뒤라서 조용했습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 전국 각지에 백범 김구 동상이 있지만, 제가 사는 인천 지역에도 김구 선생의 동상이 있다는 사실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특히 이번에 방문한 학교 안의 김구 선생 동상을 보며 학생들이 선생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게 되길 바랐는데요. 여러모로 뜻깊었던 취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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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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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물이 존재한다는 건, 그만큼 더 훌륭한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 아닐까요? 대표적으로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있었고, 한석봉의 어머니가 있었죠. 오늘은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님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 곽낙원여사의 동상 (인천대공원 백범광장에 위치)


곽씨 부인으로도 알려져 있는 곽낙원 여사는 1859년 2월 26일,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녀는 김구 선생이 어렸을 때 직접 <천자문>을 가르치고, <동몽선습>과 <사서삼경> 등을 읽히며 아들의 교육에 물심양면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895년 8월 20일 새벽, 일본 군대와 낭인들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김구 선생은 이러한 정국 속에서 안악으로 돌아오던 중이었는데요. 선생은 치하포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만나, 그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는 거사를 결행하면서 1897년 7월, 사형을 선고받게 됩니다. 이에 곽낙원 여사는 매일같이 아들을 찾아가 옥바라지를 하며 김구 선생을 격려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광무황제의 특별교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석방이 되지 않자, 이후 김구 선생은 탈옥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곽낙원 여사는 남편 김순영 선생과 함게 체포되어 인천형무소에서 3개월 간 투옥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11년 김구 선생은 비밀결사단체 신민회에서의 활동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형을 언도받게 되었는데요. 그러던 중 안명근 의사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사건’의 계획이 탄로되자 이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형을 언도받아, 총 17년형의 징역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도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의지가 꺾이는 것이 두려워 조금도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김구 선생을 위로하며  아들이 독립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


곽낙원 여사의 헌신은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여사는 1910년 일제에 국권이 피탈되고, 남편 김순영 선생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자 삯바느질과 남의 집 가정부 일을 하며 어렵게 김구 선생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22년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곽낙원 여사도 상해로 갔는데요. 쓰레기더미에서 배추잎을 주워 끼니를 연명하면서도 찬거리를 줄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습니다. 


▲ 앞줄 가운데 곽낙원 여사와 뒷줄 가운데 김구 선생


또 임시정부 단원과 김구 선생이 여사의 생일잔치를 준비하려 할 때, 이런 사정을 눈치 챈 그녀는 “생일상을 차릴 돈을 나에게 달라. 그러면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직접 준비하겠노라”며 돈을 받아 권총 두 자루를 구입하여 독립운동에 쓰라고 동지들을 격려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25년 12월 황해도 안악으로 돌아온 곽낙원 여사는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이를 피해 1934년 3월 19일 손자 김인과 김신을 데리고 상해로 다시 떠났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장손인 김인을 군관학교에 입교시키고 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서 군사훈련 중인 청년 20여명의 병영생활을 돌보는 등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곽낙원 여사는 1940년 4월 26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중국 사천성 중경에서 서거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고, 오랜 기간 수감생활을 하는 독립운동가 아들 곁에서 묵묵히 뒷바라지했던 곽낙원 여사의 심경은 어땠을까요? 아들 백범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서 조국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늘 옆에서 든든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곽낙원 여사. 그녀의 강한 신념과 인내심으로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을 이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버이날을 맞아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더 위대했던 어머니, 곽낙원 여사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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