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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11기 훈남훈녀 기자단 이다혜입니다.

길을 걷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푸르른 식물들의 키가 부쩍 크고 햇볕도 뜨거워졌더군요. 여름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나 봅니다. 이렇게 싱그러운 날 여유롭게 휴일을 보내고 싶을 때, 또는 친구들과 치킨을 먹으며 떠들고 싶을 때 어느 곳을 찾으시나요? 저는 한강을 찾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68년 전 6.25전쟁 당시 한강에서 중요한 전투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 전투는 바로 ‘한강방어선 전투’입니다. 저는 지난 5월 25일 금요일에 노들나루공원에 위치한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를 찾아갔습니다.


▲ 지하철 노들역의 입구

                        

▲ 노들나루공원 입구 팻말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는 노들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보이는 노들나루공원에 위치해있답니다. 한강방어선 전투가 생소하신 분들이 많으시죠. 제가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릴 테니 저와 함께 그 현장 속으로 가볼까요?


▲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했던 모습 (출처: 전쟁기념관)


북한군은 6월 25일 38선을 돌파하고 의정부, 동두천, 포천을 점령한 후 서울을 공격합니다. 국군은 길음교를 폭파해 더 이상 북한군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북한군은 서울로 입성한 후 길음교와 미아리 고개를 넘어 돈암동으로 발을 들여놓습니다. 


서울이 함락된 위태로운 상황 속 한강방어선 전투가 시작됩니다. 한강방어선 전투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이나 저지시킨 전투입니다!


국군은 김홍일 소장을 중심으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혼성부대를 편성하여 한강방어선을 구축합니다. 6.25전쟁의 초기, 6일간 한강방어선을 사수함으로써 북한군은 남진 계획에 있어 큰 차질을 입었습니다. 반면 국군은 부대를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고 미 지상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었으며, 이로 인해 한미 연합작전이 가능해졌지요. 



▲ 한강방어선 전투 상황도 (출처: 전쟁기념관)


이번에는 시간 순으로, 또 전투에 있어 아주 중요했던 철교를 중심으로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6월 28일,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국군은 한강 남쪽에서 시흥지구 전투사령부를 편성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막을 것을 계획합니다. 열악했던 상황에서 국군은 나룻배 등을 이용하여 한강을 건너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성공합니다.


▲ 한강철교와 끊어진 한강대교 (출처: 전쟁기념관)


북한군은 6월 30일 부분 파괴된 한강철교를 복구하려 했고, 국군은 미군의 전략폭격기 B-29의 지원을 받아 이를 방어합니다. 그러자 북한군은 경부선 철교를 복구하기 시작합니다.


▲ 북한군 전차의 한강도하 모습 (출처: 전쟁기념관)


복구된 철교를 이용해 북한군 전차가 한강을 넘어오자 국군의 한강방어선 사수는 요원해졌습니다. 7월 3일, 결국 국군은 한강방어선을 손에서 놓고 지연전을 펼치게 됩니다.


6일간 치열한 전투를 펼쳤지만 한강방어선 전투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한강방어선 전투 이후 북한은 남하를 멈추지 않았고 우리 국토의 상당 부분은 북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1950년 9월 15일 7만여 명의 군사, 261척의 함정이 동원된 인천 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의 반격이 시작되죠.


한강방어선 전투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는 한국 전쟁사에 한 획은 그은 전투입니다. 때문에 한강방어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노들나루공원에는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가 세워졌습니다. 이 명비의 건립은 국가보훈처의 지역별 호국영웅 선양 방안 사업의 일환이었답니다!


▲ 태극 모양의 조형물이 보이시나요?


▲ 전사자 1,000여명의 이름이 적혀져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생소해하셨을 한강방어선 전투는 사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강방어선 전투를 꼭 기억해야 할 이유는, 한강방어선 전투에서 천여 명의 호국영령이 산화했기 때문입니다.

목숨 걸고 한강방어선을 사수하고자 했던 천여 명의 영웅들. 저는 전사자 명비에 적힌 수많은 이름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노들나루공원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펼쳐졌던 그저 아름답게 반짝인다고만 생각했던 한강이 실은 수많은 호국영령과 유족들의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태극기로 전사자들의 넋이 기려지고 있네요.


▲ 뒤쪽 길의 전쟁 사진들


노들나루공원에 위치한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 한강방어선 전투는 6.25전쟁사에 큰 획을 그은 전투였습니다. 다가오는 주말, 천여 명의 투신이 있었던 한강방어선 전투 전사자 명비에 찾아가 보는 건 어떨까요? 이상 국가보훈처 훈남훈녀 기자단 11기 이다혜였습니다.


*참고자료

전쟁기념관 http://wmk.kr/ko/node/16430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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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6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무려 1129일 간 계속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6·25전쟁의 깊은 상처는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데요, 저는 지난 6월 호국 보훈의 달에 전쟁기념관과 6·25전쟁관련 특별전시회가 열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6·25전쟁관련 특별전시회는 존 리치(John Rich, 6.25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의 사진전 <전쟁과 일상, 그리고 희망> (War, the Everyday, and Hope)과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특별전 <67년만의 귀향> 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평화로운 새벽을 깨운 북한군의 기습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집중공격으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는데요, 도발 당사자인 북한은 6.25전쟁발발 67주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남침전쟁의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 국군이 먼저 북침하였다는 거짓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는 이러한 북한의 주장이 허위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자료였습니다.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는 1950년 6월 22일 북한군 총참모부가 각 사단에 남한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한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계획서라고 하는데요, 이 자료에는 “6월 22일 24시까지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별도 명령에 따라 진출하는 기동 계획”이 있어서 북한군의 남침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발발당시 한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는데요. 전차의 경우, 북한군이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군은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마을은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은 정든 집을 떠나 고된 피난길을 떠나야만 했는데요.

6.25전쟁 당시의 이러한 처참했던 모습들은 당시 미국 종군기자 존 리치(John Rich)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 생필품만 챙겨 떠나는 피난민 가족(왼쪽)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오른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 시가전 흔적이 남아있는 남대문(왼쪽)과 

파괴된 수원화성 장안문(오른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북한군의 기습남침 소식을 들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하였고, 이에 유엔은  6월 28일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 미국 등 16개 국가에서 유엔군을 파병하였고 인도 등 5개 국가에서는 의료지원을 해줬습니다.

유엔의 신속한 유엔군 참전결정에 따라, 가장 먼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참전했고, 뒤이어 스미스 부대를 선두로 미국 지상군이 참전하면서 국군은 전력을 재정비 할 수 있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철수하면서 충분한 전투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지연전을 계속 펼쳐 나갔습니다.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가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수많은 어린 학생들과 해외동포들까지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였는데요.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정할 당시에 조국 수호를 맹세하며 서명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의 무운장구(武運長久) 태극기와 당시 학도병의 모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운장구 태극기(대한민국역사박물관)


▲ 학도병모자와 호국학도창간호(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서울로 진격하자, 총 반격전을 개시하여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을 수복했는데요.

다시 찾은 서울시청 앞에 서 있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존 리치(John Rich)의 사진에서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다시 찾은 서울시청 앞 어린이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을 다시 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고,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압록강에 진입한 한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을 수 있었으며, 미군 제7사단도 11월 21일 한·중 국경지역인 혜산진에 도달하였는데요. 이때는 당장이라도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험난한 휴전협상,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통일을 곧 이룰 것이라고 감격에 겨워있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통일의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서울시민들을 피난 시켜야 했습니다. 서울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또다시 남쪽으로 고달픈 피난을 떠나야 했는데요. 1.4후퇴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은 불과 20여만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후에 재 반격을 시도하여 1951년 3월에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고 38도선도 회복하였으나,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함께 38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현재까지 남북한은 휴전상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6·25전쟁으로 전사하거나 실종된 우리 국군은 16만여 명에 이르고 민간인 피해도 10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1,000만여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미망인, 전쟁고아가 발생하였고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유엔군도 4만여 명이 전사하는 등 15만 여명이 부상을 입거나, 실종되고 적의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한 국군과 민간인 피해현황

국군 피해

 유엔군 피해

 민간인 피해

 계(명) 

 전사 

 부상 

 실종

 포로 

 계(명) 

 전사 

 부상 

 실종

 포로 

 계(명) 

 사망 /학살 

 부상 

 실종

 납치 /행불

 621,479

 137,899

 450,742

 24,495

 8,343

 151,129

 37,902

 103,460

 3,950

 3,950

 5,817

 990,968

 373,599

 229,625

 387,744

 *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 벽면에 새겨진 전사자명부(전쟁기념관)


6.25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지만, 약 2만 9천여 명의 유해만 수습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13만 3천여 명의 유해는 이름 모를 산하에 남겨졌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어 전국에 묻혀 있는 유해를 발굴하고 있으나, 금년 4월까지 찾은 유해는 9,500여위 뿐이고 그중에서 신원을 확인한 전사자는 121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전사자의 유해와 함께 발굴된 무기류, 군장류, 전사자의 개인물품 등 2,000여점의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전시되어 있는 유품을 보면서 당시 처참했던 전쟁을 상상해 보며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 전사자의 유해발굴 시 발굴된 전사자 유품(1)(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


아직도 북한은 크고 작은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요. 특히 2000년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그리고 2010년 3월 26일의 천안함 피격사건, 같은 해 11월 23일의 연평도 포격도발 등은 6.25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 북한의 주요 도발연표 - 전쟁기념관 6․25전쟁실


6월 호국보훈의 달은 지나갔지만,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대한민국을 위해 피땀 흘린 세계 각국의 유엔군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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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소련의 도움으로 전쟁 준비를 한 북한군은 맹렬한 기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옵니다.


급작스럽게 적과 조우한 국군은 몰아닥치는 북한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쟁물자와 병력상황에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줘야만 했습니다.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습니다.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에 남한 국토의 대부분을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국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통일을 목전에 둔 순간인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해야만 했고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장기적인 전선 교착으로 남, 북은 물론 미군, 중공군의 피해도 계속 늘어가는 상황, 그러던 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 전쟁고아의 아픔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오는 6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6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산화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 분들에게 추모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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