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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소련의 도움으로 전쟁 준비를 한 북한군은 맹렬한 기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옵니다.


급작스럽게 적과 조우한 국군은 몰아닥치는 북한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쟁물자와 병력상황에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줘야만 했습니다.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습니다.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에 남한 국토의 대부분을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국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통일을 목전에 둔 순간인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해야만 했고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장기적인 전선 교착으로 남, 북은 물론 미군, 중공군의 피해도 계속 늘어가는 상황, 그러던 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 전쟁고아의 아픔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오는 6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6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산화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 분들에게 추모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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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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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숨져갔고, 죄 없는 민간인들도 전란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죠. 전쟁고아 양산, 산업 시설 파괴 등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비극적인 6.25전쟁은 왜 일어나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의 배경과 북한의 남침 준비


▲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폭발 장면


때는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미국의 군사 점령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주체와 극동 지역 군사 작전의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되었는데요. 이 문서에 언급된 38도선은 9월 초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책임 구역을 할당하기 위한 편의적인 조치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38도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1.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 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 해, 공군과 보조 부대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항복하라

2.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작은 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류큐 열도와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육, 해, 공군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


당시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8월 말에 북한 전역을 장악한 소련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이상, 통일의 꿈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르자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내각 구성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에 김일성을 내세운 불법적인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 남북 통일 정부를 이룩하기 위해 방북한 김구 선생


북한 지도부는 민중 봉기 등을 통해서는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 달성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남침을 계획합니다. 북의 남침 계획은 1개월을 목표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하게 됩니다.


▲ 스탈린의 집무 모습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을 감행함에 따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동안, 갑작스러운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남한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적에게 서울을 내어주었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6월 25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어서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52개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사진제공: 유엔군 초전기념관)


1950년 7월 4일,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고 있던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의 많은 청년학도들과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요. 이들 중에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참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국군과 유엔군은 끝까지 낙동강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하여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10월 1일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또 중공과 러시아가 있는 두만강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정전 협정



유엔군 사령군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 부근의 모든 부대에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군하도록 독려했는데요.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게 됩니다. 이제 전쟁은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대결이 되었는데요.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밀려 내려가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해인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는데요.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38도선 부근에서는 계속해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와 저격 능선 전투 등이 이 당시 일어났던 고지 쟁탈전에 속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여 3년 이상 계속되던 전쟁이 멈추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 6.25전쟁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1,129일이나 계속된 전쟁이 멈춘 휴전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 6.25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얻은 결과입니다. 전쟁이라면 먼 얘기 같지만, 그 당시를 겪었던 많은 분들의 아픈 시간은 여전히 67년 전에 멈춰 있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10여일 남은 지금,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는 6월 25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6.25전쟁 67주년 행사'강한 안보로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거행됩니다. 


또한 6월 22일(목)부터 27일(화)까지 5박 6일동안, 미국 참전용사 및 교포 참전용사 등 83명이 재방한하여 여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6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을 잊지 않고,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참고 문헌

국가보훈처 6.25전쟁 60년 계기 교육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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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

 

화려한 네온사인과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서울.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써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도시 중 하나입니다.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로 자리 잡기까지에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는데요. 특히 6.25전쟁 당시 서울은 북한군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시가지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오는 6월이 호국보훈의 달이니 만큼, 저는 6.25전쟁 당시 서울시내에서 일어났던 전투가 궁금해졌는데요. 현재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미아리, 길음교, 한강방어선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하는 마음에, 남아있다면 그 흔적을 느끼기 위해 미아리에서 길음교, 한강방어선 전투가 있었던 노들역 인근까지 길을 떠나보았습니다.

 

▲서울역의 모습. 현재 서울은 전쟁의 상처가 아문지 오래입니다.

 

먼저 미아리 전투가 벌어졌던 미아사거리입니다. 전쟁 당시 서울에 있었던 창동 방어선 아래 설치된 미아리 방어선은 6.25전쟁이 발발한 다음날 6월 26일, 제5사단에 의해 갖춰졌습니다. 북한군에 의해 창동 방어선이 무너지고 철수 병력이 미아리 방어선 일대로 모였는데요. 당시 제5사단과 제7사단이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미아리 방어선은 북한군이 서울 도심 진입을 위해 반드시 뚫어야 했던 곳입니다. 따라서 국군의 입장에서는 이를 저지시키기 위해 반드시 북한군을 막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동북부지역의 도로는 미아리를 거쳐 혜화로 향하는 3번 국도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아리 방어선은 북한군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현재 미아사거리의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전쟁의 흔적은 지워진 지 오래입니다. 미아사거리에는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있고, 아스팔트로 잘 정돈된 도로는 ‘과연 이곳이 6.25 전쟁 당시 국군이 방어선을 펼친 곳이 맞을까?’하는 의문점도 가지게 합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현재는 미아사거리를 가리키는 이정표만이 여기가 미아리 방어선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아사거리 모습. 현재는 복잡한 시가지로 변해있습니다.

 

미아사거리에서 길음역방면으로 10여 분 걷다보면, 복잡한 교차로가 보입니다. 바로 길음교 사거리인데요. 길음교 전투는 미아리 방어선에서 치러진 전투 중 하나입니다. 미아리 방어선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조짐을 보이자, 서울 방어의 최종목표인 미아리 방어선을 위해 국군은 길음교를 폭파하려 합니다. 길음교 폭파는 북한군의 전차가 서울 도심으로 진출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함으로 진행됐는데요.

 

6월 27일 저녁, 북한군 전차부대가 수유리를 통과, 길음교에 다다르자 국군 공병대는 명령에 따라 길음교를 폭파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계획을 미리 알아차린 북한군에 의해 실패하고 마는데요. 이에 미리 매복해있던 국군 제1연대와 제15연대는 북한군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애씁니다. 그러나 6월 28일 새벽, 길음교와 미아리고개를 북한군이 넘음으로써 미아리 방어선은 붕괴되고 맙니다.

 

이곳도 미아사거리와 마찬가지로, 위에는 내부순환로가 있고, 주위에는 대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섰는데요. 역시 길음교를 나타내는 표지판이 6.25 전쟁 당시 최후의 서울 방어선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음교 교차로. 위에는 내부순환로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한강방어선전투가 치열하게 펼쳐진 노량진 사육신공원-노들나루공원 일대를 찾았습니다. 한강방어선전투는 국군에게 큰 의의를 가져다 줬는데요.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약 일주일동안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시켜, 당초 북한군의 작전이었던 ‘수원북방에서 국군 병력을 타격’하고자 했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또한 미군이 참전하기 전, 방어선을 조기 돌파할 북한군의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 북한군의 작전이 매우 큰 차질을 빚게 됐습니다. 이렇듯 한강방어선전투는 6.25 전쟁 초기에 성과를 거둔 전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한강방어선전투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6년 10월, 한강방어선의 시작인 노들나루공원에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 건립 제막식’이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는 국가보훈처에서 추진하는 ‘호국영웅 알리기 프로젝트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됐습니다. 현재 명비로 인해 이곳이 6.25 전쟁 당시 한강방어선전투가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한강방어선전투 전사자 명비에는 전사자 이름과 함께 전투에 대한 설명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1950년 6월 26일부터 7월 3일까지. 약 열흘 동안 서울과 한강 이남을 사수하기 위해 국군은 수많은 피를 흘리며, 조국을 수호했습니다. 비록 현재는 개발로 인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거나, 비석만이 당시의 치열했던 현장을 대변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는 영원히 6.25 전쟁 당시의 방어선과 전투,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에 대한 존경과 경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앞두고,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모든 이들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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