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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전쟁이 일어난 지 6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무려 1129일 간 계속된 6.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아픔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6·25전쟁의 깊은 상처는 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데요, 저는 지난 6월 호국 보훈의 달에 전쟁기념관과 6·25전쟁관련 특별전시회가 열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다녀왔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6·25전쟁관련 특별전시회는 존 리치(John Rich, 6.25전쟁 당시 미국 종군기자)의 사진전 <전쟁과 일상, 그리고 희망> (War, the Everyday, and Hope)과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특별전 <67년만의 귀향> 이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평화로운 새벽을 깨운 북한군의 기습남침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집중공격으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는데요, 도발 당사자인 북한은 6.25전쟁발발 67주년을 맞은 오늘날까지도 남침전쟁의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 국군이 먼저 북침하였다는 거짓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는 이러한 북한의 주장이 허위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자료였습니다.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는 1950년 6월 22일 북한군 총참모부가 각 사단에 남한을 침략할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한 북한군의 전면적인 남침계획서라고 하는데요, 이 자료에는 “6월 22일 24시까지 공격준비를 완료하고 별도 명령에 따라 진출하는 기동 계획”이 있어서 북한군의 남침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 북한군 남침 전투명령 1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6.25전쟁 발발당시 한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군사력에서 열세에 놓여 있었는데요. 전차의 경우, 북한군이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군은 한 대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마을은 불에 타서 폐허가 되었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은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은 정든 집을 떠나 고된 피난길을 떠나야만 했는데요.

6.25전쟁 당시의 이러한 처참했던 모습들은 당시 미국 종군기자 존 리치(John Rich)의 사진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 생필품만 챙겨 떠나는 피난민 가족(왼쪽)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마을(오른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 시가전 흔적이 남아있는 남대문(왼쪽)과 

파괴된 수원화성 장안문(오른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북한군의 기습남침 소식을 들은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청하였고, 이에 유엔은  6월 28일 유엔군의 파병을 결정, 미국 등 16개 국가에서 유엔군을 파병하였고 인도 등 5개 국가에서는 의료지원을 해줬습니다.

유엔의 신속한 유엔군 참전결정에 따라, 가장 먼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이 참전했고, 뒤이어 스미스 부대를 선두로 미국 지상군이 참전하면서 국군은 전력을 재정비 할 수 있었으며,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까지 철수하면서 충분한 전투력이 갖추어질 때까지 지연전을 계속 펼쳐 나갔습니다.


낙동강까지 후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방어선을 구축하고 “방어가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이때 국군과 유엔군은 물론 수많은 어린 학생들과 해외동포들까지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였는데요. 

6.25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출정할 당시에 조국 수호를 맹세하며 서명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의 무운장구(武運長久) 태극기와 당시 학도병의 모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운장구 태극기(대한민국역사박물관)


▲ 학도병모자와 호국학도창간호(대한민국역사박물관)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장군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서울로 진격하자, 총 반격전을 개시하여 9월 28일 드디어 서울을 수복했는데요.

다시 찾은 서울시청 앞에 서 있는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존 리치(John Rich)의 사진에서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다시 찾은 서울시청 앞 어린이들(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서울을 다시 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고, 10월 26일 오후 2시 15분 압록강에 진입한 한국군 제6사단 7연대는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을 수 있었으며, 미군 제7사단도 11월 21일 한·중 국경지역인 혜산진에 도달하였는데요. 이때는 당장이라도 우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험난한 휴전협상, 그리고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통일을 곧 이룰 것이라고 감격에 겨워있었던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철수하게 되면서 통일의 꿈을 접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으며,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서울시민들을 피난 시켜야 했습니다. 서울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또다시 남쪽으로 고달픈 피난을 떠나야 했는데요. 1.4후퇴당시 서울에 남아있던 시민은 불과 20여만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후에 재 반격을 시도하여 1951년 3월에 수도 서울을 재탈환하고 38도선도 회복하였으나, 1951년 7월 10일부터 시작된 휴전회담과 함께 38도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이어갔고,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어 현재까지 남북한은 휴전상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3년 1개월 동안 지속된 6·25전쟁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습니다.

6·25전쟁으로 전사하거나 실종된 우리 국군은 16만여 명에 이르고 민간인 피해도 100만여 명에 이르렀으며, 1,000만여 명의 이산가족과 수많은 전쟁미망인, 전쟁고아가 발생하였고 전 국토는 초토화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유엔군도 4만여 명이 전사하는 등 15만 여명이 부상을 입거나, 실종되고 적의 포로가 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6·25전쟁으로 인한 국군과 민간인 피해현황

국군 피해

 유엔군 피해

 민간인 피해

 계(명) 

 전사 

 부상 

 실종

 포로 

 계(명) 

 전사 

 부상 

 실종

 포로 

 계(명) 

 사망 /학살 

 부상 

 실종

 납치 /행불

 621,479

 137,899

 450,742

 24,495

 8,343

 151,129

 37,902

 103,460

 3,950

 3,950

 5,817

 990,968

 373,599

 229,625

 387,744

 *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통계로 본 6.25전쟁’


▲ 벽면에 새겨진 전사자명부(전쟁기념관)


6.25전쟁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지만, 약 2만 9천여 명의 유해만 수습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고 13만 3천여 명의 유해는 이름 모를 산하에 남겨졌다고 하는데요. 다행히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되어 전국에 묻혀 있는 유해를 발굴하고 있으나, 금년 4월까지 찾은 유해는 9,500여위 뿐이고 그중에서 신원을 확인한 전사자는 121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전사자의 유해와 함께 발굴된 무기류, 군장류, 전사자의 개인물품 등 2,000여점의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전시되어 있는 유품을 보면서 당시 처참했던 전쟁을 상상해 보며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 전사자의 유해발굴 시 발굴된 전사자 유품(1)(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아직 끝나지 않은 6·25전쟁


아직도 북한은 크고 작은 도발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요. 특히 2000년대를 전후하여 일어난 1999년 6월 15일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29일 제2차 연평해전, 그리고 2010년 3월 26일의 천안함 피격사건, 같은 해 11월 23일의 연평도 포격도발 등은 6.25전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 북한의 주요 도발연표 - 전쟁기념관 6․25전쟁실


6월 호국보훈의 달은 지나갔지만,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이 땅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 대한민국을 위해 피땀 흘린 세계 각국의 유엔군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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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북한군은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소련의 도움으로 전쟁 준비를 한 북한군은 맹렬한 기세로 남쪽으로 밀고 내려옵니다.


급작스럽게 적과 조우한 국군은 몰아닥치는 북한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했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전쟁물자와 병력상황에 국군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내줘야만 했습니다. 이어 8월 31일에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습니다.


전쟁 발발 두 달여 만에 남한 국토의 대부분을 북한군에 점령당한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고 국군은 압록강 근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통일을 목전에 둔 순간인 1950년 10월, 중공군이 개입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후퇴해야만 했고 38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졌습니다.


장기적인 전선 교착으로 남, 북은 물론 미군, 중공군의 피해도 계속 늘어가는 상황, 그러던 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 전쟁고아의 아픔은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오는 6월 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6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 적과 맞서 싸우다가 산화한 호국영령과 참전용사 분들에게 추모와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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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숨져갔고, 죄 없는 민간인들도 전란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죠. 전쟁고아 양산, 산업 시설 파괴 등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비극적인 6.25전쟁은 왜 일어나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의 배경과 북한의 남침 준비


▲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폭발 장면


때는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미국의 군사 점령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주체와 극동 지역 군사 작전의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되었는데요. 이 문서에 언급된 38도선은 9월 초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책임 구역을 할당하기 위한 편의적인 조치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38도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1.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 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 해, 공군과 보조 부대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항복하라

2.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작은 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류큐 열도와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육, 해, 공군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


당시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8월 말에 북한 전역을 장악한 소련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이상, 통일의 꿈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르자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내각 구성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에 김일성을 내세운 불법적인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 남북 통일 정부를 이룩하기 위해 방북한 김구 선생


북한 지도부는 민중 봉기 등을 통해서는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 달성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남침을 계획합니다. 북의 남침 계획은 1개월을 목표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하게 됩니다.


▲ 스탈린의 집무 모습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을 감행함에 따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동안, 갑작스러운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남한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적에게 서울을 내어주었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6월 25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어서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52개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사진제공: 유엔군 초전기념관)


1950년 7월 4일,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고 있던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의 많은 청년학도들과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요. 이들 중에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참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국군과 유엔군은 끝까지 낙동강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하여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10월 1일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또 중공과 러시아가 있는 두만강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정전 협정



유엔군 사령군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 부근의 모든 부대에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군하도록 독려했는데요.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게 됩니다. 이제 전쟁은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대결이 되었는데요.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밀려 내려가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해인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는데요.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38도선 부근에서는 계속해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와 저격 능선 전투 등이 이 당시 일어났던 고지 쟁탈전에 속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여 3년 이상 계속되던 전쟁이 멈추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 6.25전쟁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1,129일이나 계속된 전쟁이 멈춘 휴전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 6.25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얻은 결과입니다. 전쟁이라면 먼 얘기 같지만, 그 당시를 겪었던 많은 분들의 아픈 시간은 여전히 67년 전에 멈춰 있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10여일 남은 지금,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는 6월 25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6.25전쟁 67주년 행사'강한 안보로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거행됩니다. 


또한 6월 22일(목)부터 27일(화)까지 5박 6일동안, 미국 참전용사 및 교포 참전용사 등 83명이 재방한하여 여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6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을 잊지 않고,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참고 문헌

국가보훈처 6.25전쟁 60년 계기 교육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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