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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독립운동가’ 하면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를 꼽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 분의 독립운동가 외에도 조국 해방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한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분들도 많은데요. 오늘은 그 분들 중 한 분인 조명하 의사를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 조명하 의사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조명하 의사는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6세 때부터 한학을 배웠고 보통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습니다. 그가 보통학교에 다니던 때에 우리 민족이 총궐기한 3·1운동이 일어났죠. 그리고 일제는 만세 운동을 하던 우리 민족들을 처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이를 지켜본 어린 조명하 의사는 조국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인식하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조금씩 키워나갑니다.


그러던 중 조명하 의사는 1926년 3월 황해도 신천 군청의 서기로 근무하게 됩니다. 당시 신천 군청은 일제의 산하기관이나 다름없었는데요. 그럼에도 그가 군청에 근무하게 된 이유는 일본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군청에 취직한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1926년에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우리 민족이 또다시 대규모로 궐기하는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를 지켜본 조명하 의사는 조국독립에 강한 열망을 느끼게 되었고 본격적인 독립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나이 22살, 한 집안의 가장이었으나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면서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요.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의 뜻을 실현시킬 만한 마땅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가기 위해 중국과 가까운 대만으로 이동합니다.


1927년 11월, 대만에 도착한 조명하 의사는 대만인으로부터 보검도를 구해 기회가 찾아오면 바로 처단할 수 있도록 칼날에 독극물을 발라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 조명하 의사 의거지 (출처: 독립기념관)


1928년 5월, 조명하 의사가 그토록 기다리던 기회가 찾아옵니다. 대만에 주둔 중인 일본 군대를 검열하기 위해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까지 역임한 왕족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대장이 육군특별검열사로 파견돼 온다는 사실이 대만 신문에 보도된 것이었습니다.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생각한 조명하 의사는 일본 정계의 거물이자 민족의 원흉인 구니노미야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구니노미야가 일본군 검열을 마치고 기차편으로 대중역을 출발하기로 한 날을 의거 날짜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5월 14일 아침, 그는 보검도를 가슴에 품고 집을 나섭니다.


많은 인파 속에 숨어든 조명하의 눈앞에 여러 대의 차량에 수행원을 태우고 선두 무개차에 탄 구니노미야가 포착됩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날려 구이궁이 탄 차 뒤에 올라 그를 찔렀습니다. 하지만 차에 걸쳐진 휘장 때문에 첫 번째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위험을 감지한 무개차가 속도를 높였지만 조명하는 다시한번 힘껏 독검을 던졌습니다. 구니노미야가 깜짝 놀라 몸을 웅크려 검을 피하는 바람에 조명하 의사의 검은 구니노미야의 어깨를 스치고 운전수 등에 박혔습니다.


의거 후 조명하는 당당하게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일본 군경들에게 피체되었습니다. 그는 그해 7월 18일 대만 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24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조명하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한편, 조명하의 독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구니노미야 구니히코는 현장에서 사망하지는 않았지만 단검의 독이 온몸에 퍼져 6개월 뒤에 죽었습니다. 


▲ 조명하 의사 동상 (경기 과천시 막계동 위치)


젊은 나이에 독립 의지를 품고 우리 민족의 원흉을 처단하는데 성공했던 조명하 의사. 그는 순국 직전, “나는 삼한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 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음 앞에서도 이렇게 의연할 수 있었던 건,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사랑할 줄 아는 참된 애국자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는 5월 14일 일요일은, 조명하 의사가 의거를 치른 지 89주년이 된 날입니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일, 꼭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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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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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건우

    2017.05.13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죄송한데 이거 참고해서 동영상좀 만들어도 될까요???

  2. 김건우

    2017.05.13 14: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죄송한데 이거 참고해서 동영상좀 만들어도 될까요???

 

여러분은 안중근의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아마도 이토 히로부미 처단이겠지요.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이 외에도 민권운동, 교육․계몽 운동, 국채보상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하얼빈의거 이후부터 3월 26일 순국하실 때까지는 뤼순감옥 옥중에서 저술활동을 하였는데요. 그 대표적인 것이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입니다.
또한 나라사랑하는 마음과 평화를 갈구하는 뜻이 담겨져 있는 많은 유묵을 쓰기도 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안응칠역사’

 

안응칠역사는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1909년 12월 13일부터 1910년 3월 15일까지 자신의 출생부터 순국하기 전까지의 삶과 이토 히로부미 처단, 독립운동 등의 행적을 밝힌 자서전입니다.

 

 

<뤼순감옥 모형-안중근기념관 전시실>                   <안웅칠역사-안중근기념관 전시실>

 

한·중·일 3국이 나아 갈 길을 밝힌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의거 후 뤼순감옥에서 안응칠역사에 이어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는데요. 서, 전감, 현상, 복선, 문답으로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3월 26일 사형을 집행시켜서 시와 전감 일부만 집필하고 나머지는 목차만 남겨둔 채 끝내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동양평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당시의 시대를 동양과 서양이 경쟁하는 시대라고 하였고, 러일전쟁 당시 한국과 청국이 옛 원한을 잊고 일본을 지원한 까닭은 일본 천황이 선전조칙에‘동양평화와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명시했고, 러일전쟁이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의 행위가 러시아의 만행보다 더 심각하다. 이는 ‘동양의 평화와 한국독립을 공고히 한다.’는 일본 천황의 선전조칙과 달리 러일전쟁이후 오히려 한국을 억압해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만주 장춘 이남을 점거해 동양평화를 깨뜨렸기 때문이며 이러한 일본의 행동은 오히려 서양을 도와주는 것이다.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에 대해 계속 핍박을 가하다면,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같은 인종에게는 능욕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 서문에서 동양인종의 단합을 강조하고, 동양의 평화가 일본의 대한․대청 정책과 직결되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한편 동양평화론 전감에서는 청일전쟁, 삼국간섭, 러일전쟁 등을 살피고 일본의 제국주의를 경계 했습니다. 즉, 청일전쟁의 원인과 일본의 승리 및 청의 패배, 제정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일본의 과실, 러일전쟁의 원인, 서구열강의 대책, 한국과 청국의 대응, 러일전쟁의 조약체결,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에 대한 경종의 순으로 서술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사는 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에서도 동양평화에 대한 생각을 밝히셨는데요. “러시아가 동양의 중심지이며 항구도시인 뤼순을 빼앗고 또 이것을 일본이 빼앗고 또다시 언젠가는 중국이 도로 찾으려 할 것이니, 동양평화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한 방안으로 극동의 분쟁지인 요동반도의 뤼순을 영세중립지역으로 삼자고 제안하고, 그곳에 아시아 각국에서 정부를 대표하는 사람을 보내어 아시아 평화를 위한 상설위원회를 만들어서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장래의 발전을 도모케 할 것과 각국은 일정한 재정을 제공하여 개발은행을 설치하여 어려운 나라를 위한 공동개발의 자금으로 쓰게 하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오늘날의 EU, APEC등의 국제연합과 같은 것을 100여년 전 이미 구상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 사상가로서의 위대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렇듯 안중근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면서 세운 지표로 독립운동의 기초적 배경이 된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요.
20세기 초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넘보고 있을 때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3국이 각기 독립국으로서 서로 침략하지 않고 협력할 때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서국제국주의를 막을 수 있으며, 이때에 비로소 동양의 평화가 이룩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한국독립과 통양평화론-안중근기념관 전시실>    <동양평화론 서문중에서-안중근기념관 전시실>

 

뤼순감옥에서 쓴 유묵, ‘동포에게 고함’유묵전시회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상고도 포기한 채 약 200여점의 유묵을 쓰셨는데요. 현재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등에 약 60여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으며,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소장하고 있는 ‘위국헌신 군인본분’등 26점은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일부 진본유묵 전시전이 올해 3월 28일부터 5월 28일까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공동 주관으로 개최되는 이번 전시회는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이름으로 열렸습니다. ‘동포에게 고함’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시기 전 국내에서 찾아온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언인데요. 이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날인 1910년 3월 25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포에게 고함’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 전시실>

 
서울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1층을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진본유묵 전시를 알리는 ‘동포에게 고함, 안중근 옥중 유묵’이라는 대형 안내판이었습니다.

 

 

<유묵전시 안내판-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유목전시 취지문-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안중근 의사 옥중 유묵 특별전시전에는 ‘지사인인 살신성인’등 옥중 유묵 7점, 안중근 의사 재판의  공판방청권과 안중근 의사 재판광경을 스케치한 화첩 진본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안중근 의사의 옥중 유묵 ‘지사인인 살신성인(높은 뜻을 지닌 선비와 어진 사람은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은 지난해 11월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일본인 고마쓰 료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고 하는데요. 이는 안중근의사의 재판을 취재하러 갔던 일본의 도요신문사 통신원 고마쓰 모토코가 안중근 의사로부터 받은 것을 그의 후손인 고마쓰 료가 보관하고 있었다가 기증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유묵‘위국헌신 군인본분(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공판정을 오갈 때 경호를 맡았던 일본군 헌병 치바 도시치에게 써준 것으로써,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치바 도시치는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동을 받아 제대 후 고향에 돌아가서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이 유묵을 고이 모셨으며, 그의 사후에도 부인 기츠요와 양녀 미우라가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모셔놓고 매일 참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후 이 유묵은 1980년에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되었는데요, 치바 도시치의 고향인 일본의 쿠리하라시에 있는 대림사에서는 아직까지도 매년 안중근 의사 탄신일(9월 2일)에 안중근 의사와 치바 도시치를 기리는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지사인인 살신성인-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위국헌신군인본분-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이렇듯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간수 등 일본인들에게 유묵을 많이 써 주었는데요.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영웅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 의사가 원수였을 텐데도,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안중근 의사에게 글을 써 주기를 많이 청하였습니다.
이는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자신의 애국사상과 동양평화론, 하얼빈의거의 정당성을 밝히며 일제가 한국을 부당하게 침략하고 재판을 불공정하게 진행한 것을 지적한 것을 보고, 일본인 간수 등이 안중근 의사를 투철한 철학을 가진 애국지사이자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하얼빈의거를 단행한 위대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전시장에는 ‘국가안위 노심초사(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말에 성실과 신의가 있고 행실이 돈독하고 경건하면 비록 야만의 나라에서도 이를 따르리라)’,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황금 백만 냥도 자식 하나 가르침만 못하다)’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유묵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안중근 의사가 쓰신 유묵 60여점은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동양의 평화를 강조하거나 유교적 덕목과 전통적 가치의 이행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밝혀진 유묵 외에도 아직 행방이 밝혀지지 않거나, 개인소장으로 세상에 공개되고 있지 못한 유묵도 많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에는 단지동맹을 맺을 때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절단된 수인이 모두 찍혀 있어 쉽게 위조시비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데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유묵들도 하루 빨리 만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언충신행독경 만방가행-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이러한 유묵들 외에도 안중근 의사가 재판받을 당시인 1910년 2월 발부되었던 안중근 의사 공판방청권과 일본 도요신문사 기자 고마쓰 모토코가 남만주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안중근 의사의 공판 장면을 일부 스케치한 것이 포함된 화첩‘안봉선풍경 부 만주화보’진본도 함께 전시되고 있었는데요.
공판방청권과 화첩은 고마쓰 모토코의 후손인 고마쓰 료가 유묵‘지사인인 살신성인’과 함께 지난해 11월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입니다.

 

 

<공판방청권-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재판광경 화첩-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역사박물관 1층 전시실 출구에는 안중근의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포스트 잇에 적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었는데요. 아이들의 서툰 애정표현, 한자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대한국인, 안중근의사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채운 포스트잇 등 여러 사람의 아름다운 마음이 모여 있었습니다.

 

<대한국인 포스트 잇-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포스트 잇-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포스트 잇 쓰기 책상-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시실>

 

곧 있으면 일상속의 작은 방학, 황금연휴가 찾아오는데요.
가족, 연인들과 함께 역사박물관에 방문하셔서 독립운동가가 아닌 문장가로써의 안중근도 한 번 만나보세요~

 
훈남훈녀 제10기 기자단 이지민 기자

 
※ 내용 참고 출처 : 박환 지음‘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2013’,  (사)안중근의사숭모회/안중근의사기념관 펴냄 ‘대한의 영웅 안중근 2012’,  윤병석 지음 ‘안중근 연구 2011’,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http://ahnjungge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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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던 백범 김구 선생을 포함한 요인들은 현재 효창공원에 고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분들이 여기에 모셔진 것일까요? 그 이전에는 어떻게 활용되던 곳이었을까요?


1. 정조, 총애하던 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현재 효창공원자리에 효창묘를 조성하다


해당 지역은 조선 정조가 총애하던 세자의 이른 죽음을 슬퍼하며 조성한 묘역인 효창묘가 있던 곳이었습니다. 후궁인 의빈 성씨의 첫아들이었던 문효세자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병으로 죽고 말았으며, 이후 의빈 성씨 역시 병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문효세자를 효창묘에다 장사지냈다. 이날 새벽에 발인을 하였는데, 임금이 홍화문 밖에 나와서 곡하고 전별하였다. 다시 홍화문 안의 악차로 돌아와서 영여가 도성 밖에서 떠나기를 기다렸다. 임금이 흑립과 백포첩리를 다시 입고 묘소에 나가 최복으로 바꾸어 입고서 일을 지켜보았다. 장사가 끝나자, 임금이 친히 신주를 쓰고 초우제를 지내고 그대로 하룻밤을 지냈다. 『정조실록』 권 22, 정조 10년 7월 지살


정조가 친히 정자각의 상량문을 지었던 효창묘에 장사를 지내며 슬퍼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섯 살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슬픔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정조는 이 이후에도 자주 묘를 다녀갔으며, 정조실록 전체적으로 20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실록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보이는데요. 순조와 헌종의 경우 각각 9번, 3번에 걸쳐 언급되고 있음이 확인됩니다. 세자의 생모 역시 이곳에 묻혔는데, 정조는 이곳에 많은 나무를 심었습니다. 이후에 순조의 후궁도 같이 묻히게 되었습니다.


2. 고종, 효창묘를 효창원으로 승격시키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효창묘는 효창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효창묘 외에 원으로 승격시킨 각 묘소와 의소묘 이름을 빈청에서 당일에 회의하여 고쳐서 모두 단망으로 써서 들이라 『고종실록』 권 7, 고종 7년 12월 신미


이는 고종 2년에 이전까지 반란 세력의 대표자로 여겨졌던 정도전의 공로를 회복시켜주고 시호를 추증한 것처럼, 다양한 방면으로 선조(先祖)들의 행적을 다시금 되돌아보는 정책들을 가졌습니다. 효창원은 계속 묘소로서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3. 효창원, 공원 용지로 책정되다


청일전쟁 당시 일제가 이곳 근처에서 야영하면서부터 효창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효창원은 다른 운명을 맞게 됩니다. 1924년, 효창원은 공원 용지로 책정되었고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왕조의 유적들이 훼손되었습니다. 도시 계획상의 공원이 된 것은 1940년의 일이며, 1944년 효창원은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이 서삼릉의 경우 효창묘가 효창원으로 승격되던 해인 1870년에 같이 소현묘에서 소경원으로 개호된 곳이었습니다.


4. 광복 직후, 다시 묘소로 사용되다


광복 직후인 1946년, 김구 선생은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부탁하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한 유골을 태고사에 봉안하고 장지를 구하였습니다.* 장지는 백범이 직접 찾아놓은 효창원으로 결정되었습니다. 백범은 장례식을 한성이 생긴 이래 처음 보는 장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산(因山) 때보다도 더 큰 대성황을 이루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위한 가묘를 만들고, 그 아래에 차례로 3의사를 모셨고, 이후 1949년 국민장으로 치러진 백범의 유해도 이곳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때의 태고사는 삼각산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한 지금의 조계사를 칭합니다.) 


<3의사의 묘 : 북쪽 높은 동산 위에 있다>


<백범의 묘소>


이후 1960년에 효창운동장, 1969년에 원효대사의 동상, 같은 해 10월 반공투사위령탑이 건립되었습니다. 효창공원은 1989년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고, 2002년에는 백범김구기념관이 문을 열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공원 안의 원효대사 동상>


<반공투사위령탑>


<웅장한 백범 기념관의 모습, 안에는 백범의 유물들이 여럿 남아있다>


다시 4월, 효창공원을 걸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분들의 뜻을 생각해봅니다. 이봉창 의사 동상, 백범 기념관, 임정 요인의 묘와 같이 임시정부를 떠올릴 수 있는 효창공원은 일상 속에서 그분들을 뵐 수 있는 귀중한 장소입니다. 또한 효창공원 내에는 시민을 위한 공간인 효창운동장도 있는데요. 화창한 봄날에 가족들과 함께 산책하며 우리나라의 역사도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건 어떨까요.


<광복 70주년 기념광장 : 효창공원은 이렇게 시민들의 참여가 돋보이는 곳이다>


<이봉창 의사 동상>


<안의사의 가묘 : 아직 돌아오지 못한 독립의 영혼>


5. 참고문헌


『正祖實錄』, 『高宗實錄』

문화재청 조선왕릉 누리집

http://royaltombs.cha.go.kr/tombs/selectTombInfoList.do?tombseq=155&mn=RT_01_11_0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은경, 『정조, 나무를 심다』, 북촌, 2016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배경식 주해,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너머북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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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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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봄 그리고. . .

    2017.04.21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사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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