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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꽃샘추위가 지나 어느 새 4월의 완연한 봄이 찾아왔습니다. 포근한 날씨에 봄나들이를 계획하는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이번 기사에서는 나들이 가기 좋은 장소를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해 여러 독립운동가분들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곳, 과연 어디일까요? 바로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함께 효창공원 산책을 떠나볼까요?


▲ 효창공원 입구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묘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역사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조선 후기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효창묘라 하였습니다. 본래 효창원은 청파동과 효창동 일대에 수림이 울창한 지역에 있었으나 일본 군대가 불법으로 주둔하게 되면서 무분별한 훼손을 당하게 됩니다. 심지어 1945년 3월 일제는 효창원에 있던 묘들을 서삼릉으로 강제이전을 하고 이곳을 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광복 후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 윤봉길 ·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삼의사 묘역을 조성하면서 아울러 안중근 의사의 가묘를 나란히 모셨습니다. 또한 임정요인 차이석 · 이동녕 ·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모셔 임정요인 묘역을 조성하였고 김구 선생 서거 후 김구 선생 묘역을 조성하여 효창공원 일대는 선열묘역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공원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입구를 지나 오른쪽 산책길로 쭉 따라 걸어 올라가면 임정요인의 묘가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 의장 및 주석 이동녕 선생과 비서장 차이석 선생의 유해와, 군무부장을 역임하고 환국 후 서거하신 조성환 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 임정요인의 묘


 임정요인 묘역 옆에 있는 산책길을 따라 걸어가 자연학습장을 기준으로 내려가면 삼의사 묘역이 나옵니다.


 

▲ 삼의사의 묘역으로 가는 길


삼의사 묘역은 1945년 귀국한 김구 선생이 다음 해 7월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모시고 와 안장했고 안중근 의사의 가묘도 같이 모시게 되면서 조성되었습니다.


▲ 삼의사의 묘


안중근 의사의 가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 


1910년 3월 26일 뤼순감옥 형장에서 순국하신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찾지 못하였지만 안중근 의사의 독립정신은 우리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삼의사묘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걸어가면 바로 의열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의열사 전경


의열사는 효창공원 내에 묘역이 있는 독립운동가 7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이동녕 · 김구 · 조성환 · 차이석 · 이봉창 · 윤봉길 · 백정기 선생 등 7인의 영정과 위패를 이곳에 모셨습니다.


▲ 7인의 영정과 위패


7위 선열을 기리는 추모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60주년인 1979년 4월 13일 합동 추모제 이래 매년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는 한 분 한 분 찬찬히 살피며 묵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副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다” … 

- 백범 김구 선생의 <나의 소원> 중에서


 효창공원을 떠나면서 저는 백범 김구 선생이 남긴 말이 떠올랐습니다.

 ‘보훈’, 멀고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독립을 위해 힘쓴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보훈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따스한 봄날, 가족 혹은 친구들과 함께 효창공원에 가보는 건 어떨까요? 자연 속에서 휴식하며 선열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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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들 국가보훈처 기자단 주하늘입니다. 저는 대한민국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제99주년을 기념해 열린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에 다녀왔습니다. 


▲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 입구


이번 특별기획전은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어 독립을 외쳤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열렸습니다.

특별기획전은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국회의원회관 로비 2층에서 진행되었고 사진자료 50점, 실물자료 15점이 전시되었습니다. 


▲ 3월 2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특별기획전 개막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고 있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3월 26일, 이 특별기획전 개막식에 참석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축사에서 내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대해, “정부에서는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고자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국가보훈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관 건립과 일제강점기 수형기록 전수조사, 국외 사적지 실태조사 등을 조속히 추진하여 3.1운동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공헌하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널리 알리는데 힘써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 2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 특별 전시회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익숙하지만 둘의 연관성에 대해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듯합니다.

1919년 3월 1일 33인의 민족대표는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했습니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이고, 우리민족은 자주민임을 선언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3.1만세운동은 수개월 간 이어졌고, 이후 독립운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펼치기 위한 기관의 필요성을 느낀 선열들이 중국 상해로 집결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된 것입니다.  


독립운동의 힘을 하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 상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919년 4월, 최초의 민주공화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고 이는 독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외에 근거지를 둘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 소식을 알리기 위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 1919년 8월 21일 창간된「독립신문」상해판 창간호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임시정부가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발행한 독립공채 실물자료


임시정부의 위기와 한인애국단


 1920년대에 임시정부는 침체기에 접어들었으며, 1931년에는 일제의 술책으로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이 충돌한 사건인 만보산 사건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는 특무공작대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나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의거를 실행했습니다. 


 ▲ 이봉창 의사의 모습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지는 의거를 행하였습니다. 이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선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일본이 일으킨 이른바 ‘만보산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국민의 감정 대립도 씻겨나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모습 (출처: 문화콘텐츠닷컴)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일왕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합동으로 열린 홍구 공원에서 투탄의거를 일으켜 일본군 사령관 등을 처단하였습니다. 이 의거는 곧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중국이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육군중앙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한인애국단원들은 일제의 수탈기관을 파괴하거나 침략에 앞장선 사람들을 처단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 광복을 기뻐하는 사람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랜 세월, 독립을 열망하며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2018년, 올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99주년을 맞았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민족이 세운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였다는 것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위대한 역사입니다.



* 자료 출처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기획전

독립기념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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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올해로 수립 9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 1919년, 미주 대한인국민회 발행 대한독립선언서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는 어떠한 역사를 겪어왔을까요? 오늘은 훈터 독자 여러분들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출처: 독립기념관)


 

역사의 시작,

중국 상해(상하이)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당시 상해는 프랑스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였기 때문에 외부와 연락이 쉽고 비교적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먼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운동 인사들이 상해로 모여 정부 조직에 대해 논의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국무총리와 내무부, 외무부 등 정부 조직이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상해에서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 교통국을 두고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주요 인사와 기관에 대한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라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 윤봉길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이동 시기


그러나, 의거 이후 심화된 일제의 감시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만 했고,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등 중국 대륙 곳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운하 위의 배를 거처로 삼는 등 피난 생활을 겪기도 했습니다.



▲ 1935년 진강,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처: 독립기념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였습니다.

 

 

다시 시작된 임시정부 정착 시기,

중국 중경(충칭)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도착한 곳은 중국 중경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부터 해방까지 약 5년 동안 중경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힘을 키우기 위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라는 통합 정당을 창당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 통합을 기반으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직할군대로서, 창설된 지 4개월만에 1백명이 넘는 병력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기념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에 대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임시정부는 기나긴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을 끝내고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 중경 청사에서 촬영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이후 집무실로 사용한 경교장 (출처 : 독립기념관)



오는 4월 13일, 국내외에서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립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염원하며 모두의 힘을 한데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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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농법

    2018.04.07 1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주관 할 자격이 없다. 본인은 수년에 걸처 수차례에 걸처 민원과 신문고, 정책제안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4월 13일이 아닌 4월 11일자 임을 설명하고 각종 근거를 밝혔다.
    먼저 4월 11일자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 보훈처가 99년도 임시정부법령집을 한시준교수의 책임연구자로 하여 정리 한바 있다. 임시헌장 선포문(1919. 4. 11자)에서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이라 하였다. 또한 제6회 의정원 회의 임시헌법(1919. 9. 11) 선언문 내용은 "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하야 원년 4월 11일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으로 삼아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동 헌법 제8장 보칙58조는 본임시헌법은 공포일보 부터 시행하고 원년 4월 11일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본 헌법 시행일로 부터 폐지 함, 또한 동 헌법에 대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회의 국무원 총무국 국무총리 이승만의 명의로 하여 발행하였으며 내용또한 동일하다. 또한 임시헌시약헌(1927, 4, 11) 제5장 보칙 5조의 내용에 대한민국 9년 4월 11일부터 시행하고 대한민국 4월 7일 공포한 임시헌법은 동시에 폐기함 등과 같이 4월 11일자에 공포(발포)등의 내용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명확히 하고 있으나 수차례의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임시정부 법령을 검토, 및 거론한 사실이 없이 중국 등지에서 이루어진 기사내용을 근거로 학술회의를 하고 있으니 국민을 설득하는 자료가 미흡다는 이유가 된다. 필자의 주장이 공무원의 책상속에 또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는 생각에 배심감과 모멸감이 앞선다. 국가보훈처의 직무유기, 독립기념관의 연구원들은 지금껏 무엇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을을 조선민족운동연감의 문헌를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 13일자는 한일관계사료집을 인용하였지만, 한일관계사료집의 4월 11일자에는 임시정부수립일의 내용이 들어 있다, 4월 13일자는 이현회 교수등 국사편찬위원회 자문단이 세심한 연구와 검토 없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선포(공포/발포)한 날이라 판단하고 각종 전문서적에 인용하여 고착화 된 날이다.

    근거적 이유는 조선민족운동 연감의 4월 10일자와 11일자의 내용은 제1회의정원 회의 내용과 뒤바뀐 사실이며, 4월 13일자는 임시의정원 소집일 아니라는 점이다. 4월 13일자의 기록은 제2회, 제3회의정원 회의 내용이 기록 되어있다. 내용이 변질 된사실은 제2회의정원회의 ( 4월 22일자 ) 안건에 본국에서 국민대회를 개초하니 이미 상해에서 임시정부(의정원)의 성립을 알려야 한다는 결의 내용이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13일자에 내외에 독립정부성립을 선언하고 라고 기록하였고 이를 학자들이 세심한 검토없이 해석하여 공포일이라 설명하고 있다 , 이현회교수와 일부교수, 보훈처 마져 4월 11일은 제정일이고 4월 13일은 공포한 날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수차례 근거문헌과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보냈지만 무지한 학자들의 의견만 고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올해 1~2월중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법제처의 검토, 행자부의 협조등의 절차를 걸처 국무회의에 통과 되어야 한다고 절차를 설명하였고 2019년 달력과 각종 수첩이 제작 되기 전인 3월 전에 꼭 행정절차의 필요성까지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민원인의 노력을 무시하고 올해도 4월 13일자에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진행하겠다는 사실로 보아 담당공무원이 무능한것인지, 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는건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뭇 궁금하다,
    지난 3월 26일 귀처주관 독립기념관 주관으로 국회소회의실에서 학술회의를 진행 하였지만 그동안 한시준교수의 주장에 1922년 월력(달력)과 사진의 근거가 전부였다, 다행이도 이만열 교수가 보창로 329호 청사에서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국호와 관제,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는 논고를 발표 하였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와 한시준교수는 보창로 329호 청사를 부인하고 있었기에 반가운 내용이였다. 한시준 교수는 2004년 12월에 독립기념관의 학술용역으로 보창로329호 청사를 부인하는 용역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편협한 내용, 제한된 자료, 문화부, 독립기념돤의 보고서를 필요한 내용만 인용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학술용역의 저의를 의심하도록 기술되어 있다.

    본인을 비롯한 이수봉교수등은 각종 문헌에 보창로 329호청사가 임시정부최초청사임을 확인 할수 있는데 어찌하여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한시준 교수는 이러헌 내용을 찿아 볼수 없다.
    상해임시정부수리기념일의 장소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여 야한다. 이러한 내용은 임시정부수립 100주년를 정점으로 소상히 밝혀 주기 바란다.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의 법적인 근거는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의 각조문을 검토하시고, 잘못된 사실을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장은 공동으로 사과를 해야 하며, 빠른 시일에 행정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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