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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이는 윤봉길 의사가 조국 독립에 몸 바칠 뜻을 세우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남긴 글입니다.

 

지난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였습니다. 저는 윤봉길 의사의 업적을 알리고, 그를 추모하고자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매헌)역 근처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상설전시관 리모델링으로 인해 2월 15일(목)부터 5월 31일(목)까지 휴관된다고 하니, 관람 시에 참고 바랍니다.


▲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태극기 앞에서 폭탄과 권총을 들고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윤봉길 의사의 ‘유년기_윤봉길의사의 출생과 성장’, ‘계몽운동기’, ‘역사 무대로 진출_상해의거’, ‘순국’, ‘상해의거 그 이후’ 순으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윤봉길 의사의 신문조서


‘계몽운동기’ 전시관에서는 농촌계몽 및 부흥운동을 위하여 조직하였던 부흥원, 월진회 등과 관련된 유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당시 저술하였던 ‘농민독본’, ‘기사년일기’, 서한과 한시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청년 제군들에게', 윤봉길


‘역사 무대로 진출_상해의거’ 전시관에서는 의거 당시 사용했던 폭탄을 비롯하여 소지하고 있었던 여러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이향시', 윤봉길


‘상해의거 그 이후’에는 상해의거를 다룬 보도자료, 1962년 추서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 1932년 4월 29일 상해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가 미친 영향을 살펴볼까요?



1. 1920년대 이후 침체기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내부 결속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해외 동포들도 다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또한 1930년대 식어가는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독립에 대한 희망이 점점 사라져 변절자가 많아지던 시기에 다시 한 번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고 광복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고취시켰다.

 

3. 상해의거 이후 이와 관련된 수많은 외신 기자들은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렸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한민족이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달성하였습니다.

 

4. 더불어 만보산 사건 등으로 갈등을 겪었던 한국과 중국 양국이 오해를 풀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는 동반자로 서로를 재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국과 공동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극찬하며 조선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습니다. 1932년 5월 김구선생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육 지원 협약 등 임시정부 지원책을 논의하였습니다.

 

- 이후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장교 훈련반을 설립하여 독립군을 길러냈으며, 한국광복군 창설도 지원하였습니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까지 임시정부 활동을 크게 후원하였습니다.

 

-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 총통이 연합국 수뇌들은 설득하여 카이로 선언문 특별조항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조항을 넣어 독립의 단초를 마련하였고, 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으로 이어졌습니다.



지난 12월 19일, 효창공원 의사 묘전에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5주기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저도 이번 취재를 통해 추모의 마음 한 송이를 남기고 왔는데요.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더 자세하고 깊게 알고 싶은 독자분들은 한 번쯤 꼭 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주십시오.”

 

「백범일지」에 수록된,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결심하고 김구 선생에게 한 말입니다.

나라를 위해 큰 용기를 낸 분들이 있어, 지금 제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상 훈남훈녀기자단 김태의 기자였습니다.


* 참고사이트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http://www.yunbonggil.or.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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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저는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 특별전 /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 특별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서울 효창동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에 방문하였습니다.

 

백범김구기념관은 용산역에서 400번 버스로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11월부터 2월까지는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되며(입장마감 : 오후 4시), 3월부터 10월까지는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됩니다.(입장마감 : 오후 5시)

 

정기휴관일은 백범김구기념관 홈페이지(http://www.kimkoomuseum.org/hal/hal_3.asp)에서 확인하실 수 있으니, 관람시 참고해 주세요.



추운 날씨였음에도 많은 시민들이 전시회를 감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전시회장의 입구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김구 선생의 자동차였습니다.



이 자동차는 백범 김구 선생이 고국으로 돌아오신 후 타시던 차로, 차량번호 서울2331은 성함의 구(九)자를 숫자 네 개로 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때도 선생과 함께 하였으며, 이듬해 국민장에서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도 함께했습니다.

전시된 차량은 통일과 평화에 대한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며 김구재단에서 같은 모델을 찾아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기증한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가 침체기를 맞았을 당시, 특무공작을 위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의 일왕 폭살 의거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를 지휘했습니다.


▲ 1931년 윤봉길 선생이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과

선언문 사본(오른쪽)


이후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 중국 각처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충칭으로 옮겨간 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 자리에 취임하였습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또한 즉각적으로 대일선전포고를 준비했습니다.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과 외무부장 조소앙 선생은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는 내용의 대일 선전 성명서에 도장을 찍고, 전 세계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이후 1944년, 김구 선생은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게 됩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다는 비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백범일지 출간 70주년 기념 특별전 / 백범일지, 70년간의 대화> 전시는 12월 30일까지 진행되었으며, 특별전 전시관에서 백범일지 70년간의 출간 현황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백범일지」는 1947년 12월 15일 최초로 출간된 후, 현재까지 단행본 약 110권, 5개국 외국어판, 평전 약 100여 권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범일지 국사 원판 초판본, 1942년 2월 백범 김구 선생이 윤봉길 의사의 장남 윤종 씨에게 친필 서명하여 증정한 백범일지 국사 원판 3판본을 실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보존 상태 또한 양호했습니다. 중앙의 ‘숫자로 보는 백범일지’ 코너에서는 1947년부터 현재까지 70년간의 출간 현황과 역사를 수 있었습니다. 



7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아온 책인 만큼, 관련된 역사와 자료들도 방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시회장 한편에는 ‘백범일지 속 인간, 김구의 인간상’이라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김구 선생의 과거 행적과 활동에 대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고, 이외에도 백범과 함께한 사람들, 김구 선생의 추천 도서와 휘호 등 다양한 전시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범일지는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에도 추천도서였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추천도서가 될 명실상부한 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훈터 블로그 독자 분들 중 아직 「백범일지」를 읽지 않으신 분이 계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기념관 방문시 겨울철에는 마지막 입장이 4시로 제한된다는 점을 참고해 주세요. 백범김구기념관을 방문하여 애국심을 함양하는 경험을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참고사이트

백범김구기념관 http://www.kimkoomuseum.org/main/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659&cid=59011&categoryId=59011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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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전 1월 8일,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청년이 있습니다. 그 청년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봉창 의사(1901. 8. 10.~1932. 10. 10.)입니다. 그가 어떻게 의거를 실행하게 되었는지, 그 자세한 이야기를 알아볼까요?


│  독립운동의 시작, ‘차별과 수모’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그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 철도회사의 운전견습원 등으로 일했습니다. 일본인 직원들은 이봉창 의사를 ‘조센징’으로 부르며 차별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굴욕을 느끼며 살아갔습니다. 


이 의사는 부모와 이웃, 그리고 자신이 겪은 수모는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데에서 비롯된 민족적인 아픔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독립운동의 여정, 도쿄에서 상하이까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이봉창 의사는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약 6년간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 등으로 일하며 일본인의 생활 모습과 일본어를 익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상하이로 옮겨갔습니다.


▲ 이봉창 의사 (태극기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운명적인 만남, 백범 김구


이봉창 의사는 상하이에서도 ‘기노시타’라는 일본인식 이름을 사용하며 일제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와 상해교민단에 출입하며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았고, 일왕 폭살이라는 거사를 준비하게 됩니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 김구 선생과의 면담에서 이봉창 의사가 밝힌 각오



▲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식 당시 이봉창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 1931년 12월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출처: 독립기념관)


│  적의 심장부로 향하다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거사준비에만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1931년 12월 13일, 한인애국단 가입 선서식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중국을 출국하여 12월 말 일본 도쿄에 도착합니다. 


그는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리는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백범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투척했던 곳(일본 경시청과 皇居 사이의 도로) (출처: 독립기념관)


마침내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사쿠라다문(櫻田門) 앞에서 히로히토의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군중 속에서 몸을 일으켜 수류탄을 투척하였습니다.

이 의사가 던진 폭탄에 궁내대신이 탄 마차가 뒤집어지고 말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 이봉창 의사 의거 보도 기사 (1932. 01. 08. 출처 : 독립기념관)


의거 현장에서 체포된 이봉창 의사는 같은 해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습니다.


비록 일왕 폭살에는 실패하였지만, 그의 의거는 1930년대 한국 독립운동사의 대표적인 의열 투쟁이라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봉창 의사가 터뜨린 수류탄은 한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가 일어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보산 사건 이래 한·중 간 감정 대립도 씻는 계기가 되었죠.

 

(* 만보산 사건 : 1931년 7월 2일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지역에서

일제의 술책으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벌인 유혈사태)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서울 효창공원 내의 이봉창 의사 동상 (출처: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


1월 8일 이봉창 의사 의거일인 오늘 오전 11시, 서울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제86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날 기념식에는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광복회원, 시민, 학생 등이 참석하여 이봉창 의사의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2017년 제85주년 이봉창 의사 의거 기념식 (출처: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독립을 위해 의열 투쟁을 결심, 도쿄, 상하이를 거쳐 다시 도쿄까지 긴 시간 치열하게 의거를 준비했고, 마침내 일제를 향한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의 의거일인 오늘, 그의 다짐과 의지, 그리고 고귀한 희생을 함께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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