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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지난 7월의 독립운동가에는 조마리아 여사가 선정되어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이었고 그를 포함한 네 명의 자식을 모두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키워냈으며, 본인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 집행 직전의 안중근 의사에게 전한,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는 당부의 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자세히보기 http://mpva.tistory.com/4610)


▲ 안중근 의사 영정사진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오는 10월 26일(목)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0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도와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동양의 평화를 해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외쳤는데요.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에서도 항일 투쟁의 본보기가 되었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었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사형 집행을 앞두고 여순 감옥을 찾아온 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


이번 포스팅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8주년을 맞아, 그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토히로부미(출처: 나무위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몸에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이 응해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에는 '안응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였는데요. 후에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를 ‘안씨 가문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기록했을 만큼, 안중근 의사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 안태훈 선생을 따라, 도내에서 동학 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은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는데요.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안중근 의사는 근대적 사고를 지닌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안중근 의사가 27세가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 침략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지만, 반대 세력들과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의사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요. 사비를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위태해져만 갔습니다.


#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에 맞서다


▲ 안중근 의사의 모습(출처: 마이데일리)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는데요.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령 일대의 한인촌에서 의병을 모집한 그는 참모중장이 되어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전투 중에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 대패하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였는데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안중근 의사는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9년 1월, 그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한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 안중근 의사 의거 직전 하얼빈 역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는 1909년 9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제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고 판단한 안 의사는, 지체 없이 이토를 격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권총을 빼들어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 의사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습니다.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 방청인, 심지어 통역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본인들로 에워싸여 형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같은 해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요.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그는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거사의 이유를 밝힌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습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저술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요.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1910년 2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 선 안중근 의사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제에 항거하여 일본의 심장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민족의 교육계몽운동과 무장투쟁에 앞장섰고, 어떤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양의 평화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런 영웅이 지켜낸 땅에 살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을 기념하여 소개한 이번 포스팅을 통해, 안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20&cid=59011&categoryId=59011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www.ahnjungge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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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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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30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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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오늘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의 서거 8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1932년 1월 8일 일어났던 이봉창 의사의 폭탄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국인의 지속적인 저항을 알리며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서거 85주기를 맞아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효녕대군의 후손인 부친 이진규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이었을 때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하였는데요.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으로 일하였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제과점에서도, 새로이 취직한 철도회사에서도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계속해서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던 이봉창 의사는 이러한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잡역부로 생활하며 일본의 생활을 익혔습니다.


▲ 이봉창 의사의 모습



# 상해 입성,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


6년 동안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의 모습을 한 이 한국인 청년을 의심하였는데요. 그들은 이 청년을 계속해서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그 자는 하오리(일본식 의복)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단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와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이봉창 의사의 인생관에 크게 감복하였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 이봉창 의사가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출처: 독립기념관)


이후 두 사람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 이봉창 의사,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다


일왕폭살을 위한 거사에는 꼬박 1년의 준비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구 선생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선서식을 행한지 4일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앵전문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습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말이 다쳤으나,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피체된 선생은 같은 해 9월 30일 오전 9시,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습니다.


▲ 이봉창의사 의거 보도 기사(1932.01.08.) (출처: 독립기념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살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하였고, 이로 인해 이전에 좋지 않았던 한중 국민의 감정 대립도 없어진 계기가 되었는데요.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 제85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10월 10일(화)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의사 묘전에서 <제85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 날 추모식에는 각계 인사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지난 해 거행됐던 제84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이봉창 의사 서거 제85주기인 오늘, 이 의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뜻을 품었던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을 떠올려보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희생, 헌신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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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태극기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저격을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구(현재 서울 용산구)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지자, 그때부터 일본인 밑에서 일을 하곤 했는데요. 그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부당함과, ‘조센징’이라는 모욕적인 발언에 설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모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아무도 자신을 독립운동가로 의심하지 못하게끔 일본어를 배우고 건달 행세를 하며 적당한 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 6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월, 임시정부의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가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인 복장에 일본어를 사용하던 그에 대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요. 그러나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와 몇 차례의 면담 끝에, 그가 투철한 애국심을 토대로 조국 독립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출처: 독립기념관)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저격한 것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선언(출처: 독립기념관)


일왕 히로히토를 향한 폭탄 의거를 앞둔 이봉창 의사가 한 말입니다. 그는 일본인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동경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요.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던진 후 마차에 빗나간 것을 보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 했지만 큰 소리에 놀라 멈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의거 직후, 범인으로 다른 이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임을 밝혔습니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체포하는 일본 병사들에게 꾸중을 놓을 정도로 그의 태도는 당당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천황은 국가를 초월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의 최종 책임자인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요. 이러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였을 뿐만이 아닌, 한인애국단의 탄생을 구체화하며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하였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하에 있던 중국인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그간 좋지 않던 한중 국민의 감정의 대립도 없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왕 살해 시도라는 용감한 그의 의거는 임시 정부만이 아닌 우리 국민, 나아가 해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32년 10월 10일 시곡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광복 후에 김구 선생이 받아 서울의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이후 1996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투쟁의 발단이 된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각종 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모든 것들은, 이러한 애국지사분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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