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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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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일제의 침략 행위에 앞장선 이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 장인환(좌), 전명운(우) 의사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리 부두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당시 한국의 외교고문이었던 미국인 스티븐스였습니다.

그는 을사늑약 및 정미7조약 등 한국 식민지화 조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이로 인해 일본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여섯 차례나 훈장과 표창을 받은 바 있는 일제의 앞잡이였습니다.


▲ 스티븐스(Durham W.Stevens) (출처: 우리역사넷)


스티븐스가 일본 외무성과 한국통감부의 밀령을 수행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3월 21일,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게 유익하다'라는 망언을 하였습니다.


스티븐스의 망언은 다음 날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고, 재미 한인들은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는 긴급히 '한인공동회'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했습니다.


공동회의 회의 끝에 네 명의 총대가 선정되어 망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스티븐스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이들에게 '한국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며 또 다시 망언을 했습니다.


한인들의 항의에도 스티븐스의 망언이 반복되자, 공동회는 스티븐스를 살려 보낼 수 없다는 분위기로 팽배해졌습니다.


▲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공립협회 회관 터 (출처: 독립기념관)


장인환 선생은 1904년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와서 철도건설 현장, 농장, 식당 등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활했습니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 창립멤버가 되고, 대동보국회에 가입하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나갔습니다.


전명운 선생은 미국에서 학업을 닦아 조국으로 돌아와 독립에 헌신하기를 바라며 1903년 하와이로 이주했습니다. 선생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19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민족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했습니다.


대동보국회, 공립협회 회원으로 한인공동회에 참가했던 장인환, 전명운 선생은 계속 망언을 저지르는 스티븐스를 처단하겠다는 결심을 동시에 갖게 된 것입니다.


3월 23일 오전 9시 30분, 스티븐스는 급히 워싱턴에 가기 위해 페리 부두 인근으로 이동, 페리빌딩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전명운 선생이 먼저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 샌프란시스코항의 전경과 페리 부두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나 전명운 선생의 권총은 불발하고 말았고, 이에 선생이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머리를 내려치는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순간, 역시 권총을 들고 이들을 지켜보던 장인환 선생이 스티븐스를 향해 방아쇠를 세 번 당겼습니다. 첫발은 빗나가 전명운 선생의 어깨에 맞았으나, 제2, 3발은 스티븐스의 등과 허리에 명중하였습니다. 


의거 직후,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등 한인사회는 다시 제2의 공동회를 개최하여 두 의사의 공판에 대비했습니다. 두 의사의 공판을 위한 의연금이 미국은 물론 국내, 중국, 멕시코 등 각지의 동포들로부터 7,390달러나 모였습니다. 


스티븐스 처단 의거에 대한 공판이 열렸고, 전명운 선생은 스티븐스가 '한국의 월급을 먹는 자로 일본을 찬조하여 우리의 조국을 배반'하였기에 애국심을 가지고 의거를 실행했다고 당당히 밝혔습니다. 일제는 선생에게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도록 책동하였지만 선생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습니다. 


장인환 선생은 1909년 1월까지 약 280일간 공판을 받았습니다. 검사와 일제 측은 선생을 일등 살인법으로 몰았으나, 변호인은 선생의 총격이 결코 일반적인 살인이 아닌 애국심으로 인한 범죄이므로 애국지사로서 무죄 방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공판은 한국측의 승리로 끝나 선생은 2급 살인죄를 받고 25년 형을 받았으나, 선생의 모범적인 복역과 미주 한인사회의 석방운동으로 10년만인 1919년 1월 방면되었습니다. 


▲ 장인환 의사가 출옥한 직후 촬영된 전명운(좌), 장인환(우) 의사의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장인환, 전명운 선생의 의거는 국내외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국제여론에 보여줄 수 있었고, 국내와 해외의 항일민족운동이 통합되었으며 안중근 의사, 이재명 의사 등 많은 의열투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일제의 하수인에 대한 의거를 단행한 장인환, 전명운 의거. 두 의사의 의거는 의열투쟁으로서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흩어져 있던 해외 동포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결속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기억하며, 우리 독립운동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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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지난 7월의 독립운동가에는 조마리아 여사가 선정되어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모친이었고 그를 포함한 네 명의 자식을 모두 훌륭한 독립운동가로 키워냈으며, 본인 스스로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 집행 직전의 안중근 의사에게 전한,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는 당부의 말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 자세히보기 http://mpva.tistory.com/4610)


▲ 안중근 의사 영정사진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오는 10월 26일(목)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지 10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도와 동양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상가이자,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동양의 평화를 해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외쳤는데요.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는 우리나라 뿐 아니라 중국, 베트남에서도 항일 투쟁의 본보기가 되었죠.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었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사형 집행을 앞두고 여순 감옥을 찾아온 동생들에게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언


이번 포스팅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 108주년을 맞아, 그의 숭고한 희생과 업적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토히로부미(출처: 나무위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몸에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이 응해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렸을 때에는 '안응칠'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도 아는 사이였는데요. 후에 「백범일지」에 안중근 의사를 ‘안씨 가문의 총 잘 쏘는 청년’으로 기록했을 만큼, 안중근 의사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두각을 드러냈는데요. 그는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때 부친 안태훈 선생을 따라, 도내에서 동학 혁명을 빙자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는 무리들의 토벌에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 선생은 개화당 인사들과 교류가 깊었는데요.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안중근 의사는 근대적 사고를 지닌 청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학교를 설립하며 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다


안중근 의사가 27세가 되던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망국의 상황이 도래하고 말았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국권 회복을 위한 방책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천주교 관계자들을 통해 일제 침략의 실상을 널리 알리는 외교 방책으로 국권회복을 도모하였지만, 반대 세력들과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한 채 귀국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의사는 평안남도 진남포로 이사하면서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는데요. 사비를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1907년 2월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안중근 의사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조직하여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조국의 운명은 위태해져만 갔습니다.


#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군에 맞서다


▲ 안중근 의사의 모습(출처: 마이데일리)


안중근 의사는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하였는데요. 이는 국외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전략을 구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노령 일대의 한인촌에서 의병을 모집한 그는 참모중장이 되어 부대를 이끌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고,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 공격하여 그들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습니다. 전투 중에 일본군과 일본 상인들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 의사는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사로잡힌 적병이라도 죽이는 법이 없으며, 또 어떤 곳에서 사로잡혔다 해도 뒷날 돌려 보내게 되어 있다.”고 하는 만국공법에 따른 것이었고, 또 의사가 믿고 있던 천주교의 박애주의의 소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 포로를 석방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이끄는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군의 공격으로 대패하게 됩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여곡절 끝에 블라디보스톡에 머물면서 교포 신문인 <대동공보>의 기자, 한인민회의 고문 등을 맡아 활동하였는데요. 위기의 순간이었지만, 안중근 의사는 독립전쟁전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1909년 1월, 그는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고 구국에 헌신한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다


▲ 안중근 의사 의거 직전 하얼빈 역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그러던 중, 안중근 의사는 1909년 9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한국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파괴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제 만주를 침략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고 판단한 안 의사는, 지체 없이 이토를 격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권총을 빼들어 이토 히로부미에게 3발의 총탄을 명중시켰고 이토는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체포될 때, 안 의사는 러시아 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호하였습니다.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된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총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 방청인, 심지어 통역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일본인들로 에워싸여 형식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가족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같은 해 2월 14일 공판에서 의사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받게 되는데요. 이후 안중근 의사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모친, 조마리아 여사의 말에 따라 공소도 포기한 채 여순감옥에서 그는 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거사의 이유를 밝힌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쏟았습니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의 저술이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 집행을 연기해 줄 것을 요구하였는데요. 그러나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1910년 2월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공판정에 선 안중근 의사

(출처: 안중근 의사 기념관)


일제에 항거하여 일본의 심장을 저격한 안중근 의사.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습니다. 민족의 교육계몽운동과 무장투쟁에 앞장섰고, 어떤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동양의 평화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이런 영웅이 지켜낸 땅에 살고 있다는 것에 우리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을 기념하여 소개한 이번 포스팅을 통해, 안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20&cid=59011&categoryId=59011

안중근 의사 기념관

http://www.ahnjunggeun.or.kr/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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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0.30 11: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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