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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0일, 오늘은 일본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의 서거 85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1932년 1월 8일 일어났던 이봉창 의사의 폭탄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국인의 지속적인 저항을 알리며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서거 85주기를 맞아 그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


이봉창 의사는 1900년 8월 10일, 효녕대군의 후손인 부친 이진규씨와 모친 밀양 손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0살이었을 때 용산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하여 4년 후 졸업하였는데요.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의 종업원으로 일하였고, 만주로 건너가 남만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생으로 근무하였습니다. 제과점에서도, 새로이 취직한 철도회사에서도 일본인 직원들로부터 계속해서 굴욕적인 수모와 설움을 받았던 이봉창 의사는 이러한 설움이 모두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후 선생은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를 전전하며 일본어를 익히는 한편, 상점 점원, 철공소 직공․잡역부로 생활하며 일본의 생활을 익혔습니다.


▲ 이봉창 의사의 모습



# 상해 입성,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과의 만남


6년 동안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갔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은 ‘기노시타’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며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의 모습을 한 이 한국인 청년을 의심하였는데요. 그들은 이 청년을 계속해서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하는 백범 김구 선생에게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백범은 어찌하여 우리 한국인인지 일인인지 모르는 자를 임정 건물에 출입하도록 놔두고 있습니까? 그 자는 하오리(일본식 의복)를 입고 게다짝까지 신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며 그가 단순 ‘건달’이 아님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와 여러 차례 비밀 면담을 가지며, 다음과 같은 이봉창 의사의 인생관에 크게 감복하였습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살을 더 산다고 해도 지금까지 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0년 동안에 인생의 쾌락이란 것을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 이봉창 의사가 1931년 12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

(출처: 독립기념관)


이후 두 사람은 이봉창 의사의 일본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일왕폭살계획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 이봉창 의사,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일왕을 향해 폭탄을 투척하다


일왕폭살을 위한 거사에는 꼬박 1년의 준비 시간이 걸렸습니다. 김구 선생이 거사에 필요한 자금과 폭탄을 구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으로 가장하여 일본인이 운영하는 철공소에서 일하며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를 마친 1931년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이 이끄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출처: 독립기념관)


선서식을 행한지 4일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 선생에게 이날 거사를 치르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는 앵전문 앞에서 일왕 행렬이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때를 놓치지 않고 일왕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하였습니다. 수류탄은 일본 궁내대신이 탄 마차 옆에 폭발하여 일장기기수와 근위병이 탄 말 두 필을 말이 다쳤으나,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피체된 선생은 같은 해 9월 30일 오전 9시, 경찰들이 겹겹이 둘러싼 가운데 진행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고,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습니다.


▲ 이봉창의사 의거 보도 기사(1932.01.08.) (출처: 독립기념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한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1946년 서울의 효창공원에 윤봉길, 백정기 의사와 함께 안장했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습니다.


비록 거사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사의 일왕폭살 의거는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해 놓은 일왕의 행차에, 그것도 그들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폭탄을 투척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요.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하였고, 이로 인해 이전에 좋지 않았던 한중 국민의 감정 대립도 없어진 계기가 되었는데요.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성과 지속적인 저항성을 전세계에 보여주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 제85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10월 10일(화)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내 의사 묘전에서 <제85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사)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이 날 추모식에는 각계 인사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와 회원, 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봉창 의사의 숭고한 삶과 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지난 해 거행됐던 제84주기 이봉창 의사 추모식


이봉창 의사 서거 제85주기인 오늘, 이 의사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큰 뜻을 품었던 모든 독립운동가 분들을 떠올려보는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희생, 헌신하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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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태극기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저격을 선서하는 이봉창 의사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8월 10일, 경성부 용산구(현재 서울 용산구)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13세 되던 해에 가정 형편이 급격히 어려워지자, 그때부터 일본인 밑에서 일을 하곤 했는데요. 그는 조선인보다 일본인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부당함과, ‘조센징’이라는 모욕적인 발언에 설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수모가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서히 독립운동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봉창 의사는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아무도 자신을 독립운동가로 의심하지 못하게끔 일본어를 배우고 건달 행세를 하며 적당한 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약 6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1931년 1월, 임시정부의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가게 되는데요. 이곳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일본인 복장에 일본어를 사용하던 그에 대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는데요. 그러나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와 몇 차례의 면담 끝에, 그가 투철한 애국심을 토대로 조국 독립을 위해 어떤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면서 작성한 선서문(출처: 독립기념관)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저격한 것에 대한 한국독립당의 선언(출처: 독립기념관)


일왕 히로히토를 향한 폭탄 의거를 앞둔 이봉창 의사가 한 말입니다. 그는 일본인을 가장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는데요. 이듬해인 1932년 1월 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동경의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에서 수류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는데요.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던진 후 마차에 빗나간 것을 보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 했지만 큰 소리에 놀라 멈추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의거 직후, 범인으로 다른 이가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당당하게 자신의 행동임을 밝혔습니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자신을 체포하는 일본 병사들에게 꾸중을 놓을 정도로 그의 태도는 당당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천황은 국가를 초월한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의 최종 책임자인 일왕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중국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요. 이러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하였을 뿐만이 아닌, 한인애국단의 탄생을 구체화하며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이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 언론에서도 이봉창 의사의 용감한 의거를 보도하였는데요. 이로 인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하에 있던 중국인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그간 좋지 않던 한중 국민의 감정의 대립도 없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왕 살해 시도라는 용감한 그의 의거는 임시 정부만이 아닌 우리 국민, 나아가 해외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친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1932년 10월 10일 시곡 형무소에서 순국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광복 후에 김구 선생이 받아 서울의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이후 1996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비롯한 의열투쟁의 발단이 된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그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각종 행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의 모든 것들은, 이러한 애국지사분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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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과 순국


2017년 3월 26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따뜻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걷다보니 어느새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추모식은 아침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 의사 순국 107주기임을 알리는 기념관 외벽의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현수막에 적혀져 있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은 당신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불타는 애국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여순 관동법원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던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으로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 박환 지음,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안중근 의사기념관, 2013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께서는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어머니를 걱정하던 안중근 의사께서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기념관 강당 앞의 추모식 현수막(좌)과 전시실 안 의사 유언장면(우)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7주기 추모식 행사


추모식은 10시부터 시작하였지만 추모식을 시작하기 전, “안중근 의사 알리기 UCC공모전”에서 수상한 UCC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의 내용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주장한 부분과 자식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글이 나오는 장면이 인상 깊었으며, 가슴 한 켠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오전 10시, 드디어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기 위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이 안중근의사기념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추모식에는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과 안 의사의 유족인 외손녀 황은주 여사, 증손자 안도용(미국명, 토니안), 광복회 박유철 회장을 비롯한 내빈과 학생, 시민 등 약 50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당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습니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및 최후의 유언 낭독, 행사주관 단체인 안중근 의사숭모회 이사장 및 내빈 추모사, 추모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안내 리플렛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꽉 메운 참석자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은 추모식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전혀 잃지 않으셨다”고 말하며, “국민 모두는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도 추모사에서, “애국혼의 표상이시며 평화론자이셨던 안중근 의사님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하였고, 광복회 박유철 회장도 “안중근 의사께서 주장하셨던 동양평화론을 토대로 한․중․일 3국이 합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의 추모식사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의 추모사


내빈 추모사가 모두 끝나고 추모공연으로 성악가 2명이 ‘별이 되어’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으며, 안중근 의사의 숭모사업에 헌신하고 한․일 및 한․중 간 교류․우호증진에 공로가 있는 일본인 2명과 중국인 1명에게 국가보훈처장의 감사패가 수여되었습니다.


▲추모 공연


감사패 수여


다음으로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 및 앞서 상영되었던 UCC공모전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참석 내빈들의 헌화와 참석자 모두가 역사청소년합창단과 같이 ‘안중근 의사 추념가’를 제창하는 것을 끝으로 추모식 행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글짓기 및 UCC 공모전 시상식


역사청소년합창단 추모가 합창


추모식이 끝난 후 의정부에서 온 참석자 A씨는, “안중근 의사가 꿈꿨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또다른 참석자 B씨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지 107년이 되었으나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니 후손된 한 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럽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사관계자 L씨는 “많은 국민들은 안중근 의사가 단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는 교육운동, 계몽활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 옥중에서의 동양평화론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 나라의 독립운동을 넘어 동양평화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지향했던 평화론자였다”고 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통해 안중근 의사께서 염원하셨던 세상을 국민 모두가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안중근 의사는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걱정했던 교육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셨던 사상가이자 평화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 의사의 생애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따뜻해진 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가신 안중근 의사의 추모식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돌아올 봄에는 여러분도 추모식에 참여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겨보며 그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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