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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무장투쟁을 주도한 지도자

안중근 의사의 동지, 조응순 선생


조응순 선생은 1908년부터 1920년대 전반에 이르러 연해주와 북만주 등지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한 대표적 지도자입니다.


1908년, 조응순 선생은 연해주에서 전제익 의진에 들어가 의병 300여 명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1914년에는 합성학교를 설립하고 이범윤, 최재형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기도 했지요.


1909년, 안중근 의사 등 12명과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단지동맹을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에도 일조했습니다.


1919년 한국독립단을 결성하고 부단장으로서 일본 관헌을 공격했고,

1921년 한국의용군 결사대장으로 대원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조응순 선생의 형(刑) 집행 내역이 기록된 '신분장 지문원지'에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의 지문이 찍혀 있지 않습니다. 안중근 의사 등 12명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었기 때문이지요.


조응순 선생은 지난 11월 17일, 제78회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연해주와 북만주 등지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조응순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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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유진

    2017.12.22 11: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억하겠습니당!!!


위정척사, 을사늑약, 항일의병


오늘은 이 세 가지 키워드에 관련된 인물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누구일까요?

바로 조선 말기의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의병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선생입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 고령의 나이로 의병을 봉기한 최익현 선생에게는 배울 점이 많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세 가지 키워드로 면암 최익현 선생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최익현 선생의 초상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위정척사


최익현 선생은 흥선대원군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려는 목적에서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도록 했습니다. 최익현 선생은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며, 흥선대원군이 고종 대신 정치를 이끌어 가는 것에 대해 퇴출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게 됩니다. 이 일로 최익현 선생은 제주도로 2년 동안 귀양을 가게 되었지요.

 

이후 선생은 일본의 수교 요청에 대해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1875년 9월 20일, 강화도에서 ‘운요호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 해안을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조선 수군에 의해 방어적 공격을 받자 보복하며 이에 대한 책임을 조선에 물은 일을 가리킵니다.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책임에 대한 결과로 강제 수교인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였습니다.



▲ 일본 헌병에 체포된 최익현 선생

(출처 : 한국근현대사사전)


당시 최익현 선생은 이를 두고 고민하던 왕과 내각들에게 수교에 응하게 되면 발생할 폐단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결국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됩니다. 


#을사늑약


최익현 선생은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주장하며 의병 활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최익현 선생은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단발령을 적극 반대하였습니다.



▲ 최익현 선생의 대마도 일기

(출처: 독립기념관)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최익현 선생은 늑약의 무효화와 을사오적(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를 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정세 속에 상소는 힘이 없었고, 결국 1906년 2월 선생은 직접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합니다. 


#항일의병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최익현 선생의 의병진에 참여했고, 선생은 전라북도 태인에서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원으로 입성하려 할 때, 우리나라의 장병들로 구성된 진위대와 대치하게 되었고, 같은 민족과 싸우는 것을 원치 않았던 최익현 선생은 의병진을 해산하였습니다. 선생과 의병 일행은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고, 대마도로 유배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최익현 선생은 “일본인이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단식하며 항거했다고 합니다.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도 고령의 나이였던 면암 선생은 1906년 11월 17일, 유배지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최익현 선생 동상 (출처: 현충시설 정보 서비스)


최익현 선생은 강직한 성정으로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았으며, 관직에 몸을 담았을 때에도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하며 평생 국권 회복을 위해 활동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0565&cid=59011&categoryId=590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29328&cid=46623&categoryId=46623

한국근현대사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19700&cid=42958&categoryId=42958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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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하면 전등사를 꼽는 이유는 단지 볼거리가 많은 문화재이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전등사는 강화에서 가장 큰 절이기도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강화의 역사와 함께 숨가쁘게 달려온 곳이기 때문입니다.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되어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이곳은 1907년부터 1908년까지 강화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 전등사 정문


▲ 삼랑성


# 전등사

전등사 정문은 삼랑성문의 동문과 남문이 있습니다. 삼랑성,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합니다. 삼랑성문 오른쪽에는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습니다.  강화 전등사가 걸어온 기념비적 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는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윤장대


가을공기를 마시며 바스락거리는 단풍을 보며 걷다 보면 대조루에 도착하게 됩니다. 대조루는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입니다. 



▲대조루의 전경


대웅전은 조선 광해군에 지은 것으로 정면 3칸 측면과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가을 안정감이 있고 국화꽃으로 장식되어 더욱 우아하게 느껴집니다.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 범종은 중국 송나라때 회주 숭명사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입니다.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가져다 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놓았는데요.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습니다. 몸통 위 부분에는 8괘가 있으며,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습니다.


▲전등사 범종, 해설사 모습


▲전등사 범종


전등사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전국 6개군의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불교의 한 종파가 있어서 본부가 되는 큰 절)이었습니다. 


# 전등사 - 강화의병전투지

이동휘 선생은 1907년 7월 이전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를 이끌어 강화도민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1907년 7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분노한 선생은 전등사에서 해산군인 등 400여 명을 모아 ‘합성친목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일집회를 열어 일반 군중을 고무시켰습니다. 


▲이동휘 선생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후 이동휘 선생은 군대 동지인 연기우, 김동수 등과 더불어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 잡혀 옥고를 치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선생은 중국 상해로 넘어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체포된 이능권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이능권 선생은 강화군 부내면 국정리 출신으로, 구한말 대한제국 군대의 육군대장이었습니다. 1905년, 선생은 고종 황제의 밀서를 가지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는 이준 열사 일행을 국외로 호송하는 임무를 완수였습니다.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자, 이능권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대동창의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친일파 밀정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군은 의병의 항전이 이어지자 1908년 10월에 용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정규 병력을 강화로 투입하였습니다. 이능권 선생이 이끄는 부대는 전등사에서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죠. 거센 공세가 이어졌지만 이능권 선생의 부대는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격퇴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이후 이능권 선생은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이며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던 중 체포당한 선생은 1909년 11월에 순국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전등사의 보호수인 은행나무


▲전등사에서 바라본 단풍


전등사를 돌아보며,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선열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등사에 방문하여 과거 의병의 항일정신을 배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참고자료> 

전등사 홈페이지 www.jeondeungsa.org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국가보훈처 사적지 찾아보기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43480&cid=42840&categoryId=4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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