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6,056,657
  • Today | 1,843
  • Yesterday | 2,288

'이달의독립운동가'에 해당되는 글 40건

  1. 2018.05.01 5월의 독립운동가 신건식, 오건해 선생 (1)
  2. 2018.04.02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
  3. 2018.02.01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가정의 달인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분은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신건식, 오건해 선생입니다.
 

 

가족사진, 왼쪽부터 오건해, 딸 신순호 신건식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신건식 선생

 

1889년 충북 청원군에서 태어난 신건식 선생은 형 신규식 선생을 따라 1911년 상해로 망명하였고 항저우에 있는 저장성 의약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였습니다.

 

1912년 공부를 마친 선생은 형 규식이 박은식 등과 함께 만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 대동보국단(大東報國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 및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외과주임으로 근무하며 난징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와 학생들의 숙식 경비를 지원했습니다.

 

1939년 제31회 의정원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신건식 선생은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했습니다.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의 지휘권을 중국 정부로부터 되찾는 일에 기여했으며, 1943년 임시정부 재무부 차장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는 일에 힘썼습니다.

 

▲ 임시정부 환국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의 삶을 보살피다

오건해 선생

 

오건해 선생은 1926년 경 남편 신건식 선생이 있는 중국으로 이주하였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에 힘썼습니다.

 

특히, 1938년에는 남목청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 선생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회복시켰습니다.

 

아울러, 1940년 한국혁명여성동맹 설립을 주도하고 1942년 한국독립당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가하였습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독립운동 명문가문을 이루다

 

신건식, 오건해 선생은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신건식과 사돈 박찬익 /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출처: 독립기념관)

  

가족이 함께 독립운동에 헌신하며 대한민국의 진정한 명문가문을 이룬 신건식, 오건해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김준식(네스카페)

    2018.05.03 12:4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먼저, 이제 계절의 여왕이자, '가정의 달', 5월이 시작됐는데요. 사실상 이번 달부터 봄의 기운은 점점 물러가고, 더운 여름의 기운이 찾아오는 만큼, 6월(호국·보훈의 달)이 되기 전에 봄의 정취를 만끽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달을 맞아 보훈처에서 뽑은 5월의 보훈인물에 모두 여성 인물이 들어 가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변화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독립운동가에 선정되신 (신건식 선생의 부인) 오건해 여사의 경우에는 음식 솜씨가 대단해서 오 여사의 음식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한편으로는, 남성들이 나라를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열심히 헌신하고 있을 때, 그 노력이 성공의 결과를 낳기 위해서는 뒤에서 이 분들의 뒷바라지를 해 줄 수 있는 또다른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뒷바라지가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이 노력은 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니까요. 또, 이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던 당시의 수많은 여성들의 기록을 보면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입증이 될 수 있겟네요.

    이제 7월에 독립운동가 연미당 여사가 또 소개가 되겠지만, 역사는 결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고(오죽하면 역사를 상징하는 영어 단어도 History, His+Story였을까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나라를 위해 직·간접적으로 헌신하셨던 여성 인물들의 일대기도 많이 발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이번 '가정의 달', 5월에 하게 됩니다.

    끝으로, 훈터 블로그 운영진 분들과 모든 국가보훈처 관계자 분들께서도 항상 하시는 모든 일마다 건강과 행복이 늘 함께 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리며, 앞으로도 좋은 정보를 통해서 국민들의 나라사랑 의식 함양에 가교(架橋)가 되어 주셨으면 좋겠다는 당부 말씀을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8. 5. 3. 충남 아산에서 나라사랑의 마음이 각별한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 드림.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완연한 봄이 된 4월. 따스한 봄을 맞아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윤현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 윤현진 선생


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선생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하며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하며 반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출처: 독립기념관)


1916년 귀국한 윤현진 선생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끔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 백산무역주식회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월 21일.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윤현진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을 맡았고,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만드는 등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윤현진 선생은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이 되어 살림을 책임지게 됩니다.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같은 해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왼쪽 뒷줄 2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아마도 위의 사진은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는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임시정부의 행정부) 성립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된 것인데요,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뒤편, 왼쪽 뒷줄 2번째에 있습니다. 


위 사진의 윤현진 선생이 유난히 다른 분들에 비해 앳된 모습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어리거나 많은 나이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 상해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60여명의 내빈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윤현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운 윤현진 선생의 묘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서 젊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함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여러분!

2018년 새해, 1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린 것이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2월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드리게 되었네요.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릴 2월의 독립운동가는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투쟁을 전개한 대한신민단 단장, 백추 김규면 선생입니다.


▲ 김규면 선생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난 김규면 선생은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운영하는 육군무관학교 속성과에 입학하였고, 무관이 되어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1904년, 한일의정서가 강제로 체결되어 학교가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되자 그 꿈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 김규면 선생의 직접 쓴 회고록인 ‘노병 김규면 비망록’.

(출처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이동휘 선생


이후 훈춘으로 망명한 김규면 선생은 1915년, 일제가 종교 탄압을 위해 포교규칙을 공포하자 이에 반발하여 민족종교 단체인 ‘대한성리교’를 만들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또한, 김규면 선생은 스스로 무관이 되지는 못했지만 독립군 양성에도 힘썼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14년 이동휘 선생과 함께 중국에서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한 것을 들 수 있지요.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청산리전투도(출처: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규면 선생은 이에 호응하여 대한신민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활동했습니다.

독립전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려 했던 그의 노력은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 블라디보스톡에서 동지들과 찍은 사진_1920년

(앞줄 왼쪽부터 김규면, 장병태, 이홍파, 손두현,

뒷줄 왼쪽부터 김병화, 김일수)


1924년, 김규면 선생은 윤자영 선생과 함께 조직한 상해청년동맹을 통해서 중국 학생계와 연대를 구축하고자 했습니다. 한중연대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이 과정에서 선생은 피습을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으나, 계속해서 독립운동의 힘을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10년대 연해주 블라디보스톡 전경. (출처: 독립기념관)


▲ (왼쪽) 김규면 선생과 아들 김호둔, (오른쪽) 말년의 김규면 선생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 선생은 연해주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짐지만, 선생은 소비에트 연해주위원회의 탄압대상이 되어 모스크바로 피신하게 되었고, 1969년 88세의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정부는 200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누비며 무장독립운동을 이끌어간 2월의 독립운동가, 김규면 선생을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영웅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조마리아 여사 서거 91주기, 안중근 의사를 길러낸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조력자
헤이그에서 일제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린, 이준 열사 순국 111주기
7월 27일은 유엔군 참전의 날! 부산 유엔평화기념관에 가다
2018 유엔참전국 청소년 평화캠프 - ①, 하나의 미래를 향한 하나의 마음!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