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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남 이상정 선생은 1896년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집안은 가족 모두가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던, 이른바 독립운동가문이었습니다. 또한 이상정 선생은 일제 강점기 3대 저항시인 중 한 분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남긴 이상화 시인의 형이기도 합니다.


▲ 청남 이상정 선생


이상정 선생은 1920년대 초반에 평안도 등에서 교사로 재임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5년 중국으로 망명하게 되는데요. 이후에는 중국 하북성 등지에서 풍옥상군 참모부의 막료로 근무하면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 운동에 가담, 활동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같은 부대에서 근무했던 권기옥 선생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권기옥 선생은 학생시절 독립운동 기금을 모으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며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한국 공군 창설의 지대한 영향을 미친 ‘공군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는 분입니다.


▲ 이상정 선생 가족사진 (가운데가 권기옥 선생)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되고 당시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내고 있던 이상정 선생은 1938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발을 담구면서 본격적으로 광복군 창설 활동에 기여함과 동시에 대중(對中) 외교통으로 활약합니다. 1년 뒤 임시정부 외무부 외교연구위원과 임시의정원 경상도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활동하게 되죠.


▲ 광복군 창설식 당시 사진


당시 중국은 광복군이 중국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 조항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이상정 선생은 한중 간 평등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중연대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 조항 취소 등을 담은 ‘광복군에 관한 건’의 대표제안자로 나섰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는 중국 측이 요구한 9개 조항 중 일부만을 받아들이는 선에서 경제적 지원을 약속 받게 됩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말기의 주요 업적이기도 했습니다.


1945년, 한민족 모두가 그토록 고대하던 독립을 맞이하면서 평소 염원하던 ‘일본군 타도’ 목적을 달성한 선생은, 중국 지역에서 중국인들의 박해로부터 한국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지 2년 째, 모친상을 당한 이상정 선생은 급히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상심이 너무 컸던 탓일까, 선생은 돌연 뇌일혈로 쓰러져 별세하였습니다. 향년 52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건국훈장 독립장(출처: 대한민국 상훈)


‘만리장천 떠나는 기선소리 잠든 나를 깨워 고향가자네’

이상정 선생이 중국 망명 시절 부모와 고향, 나라를 그리워하며 썼던 <망향가>의 구절입니다. 자신의 삶의 대부분을 먼 타지에서 보내며, 항상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평안을 위해 애쓴 청남 이상정 선생. 그의 이름은 조금 생소할지라도, 지금부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독립운동가일 것입니다.


▲ 이상정 선생이 망명 초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 <망향가>

(출처: 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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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우리나라는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경술국치를 당했습니다. 그 이후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세우고 우리나라를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려는 정책을 펼치게 되죠. 학교 역사수업에서 배웠듯이 통상적으로 일제강점기 35년은 크게 3개의 시기로 나뉘는데요. 그 중에서도 1930년 이후의 시기를 ‘민족말살통치’라고 부릅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고 정신마저 일본화시키고자 한 것이죠.

1910년 국권 침탈 후,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워 한반도의 식민통치와 수탈을 위한 기관으로 활용했는데요. 조선어 사용 금지, 창씨개명, 강제징용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죠. 오늘은 그 가운데서도 음악을 이용해 우리 민족을 일본화 시키려 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해요.!



대구 전역에 울려 퍼진 일본풍 음악


19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는 대구와 관련된 노래를 창작 의뢰하였고, 음반을 통해 대중화시켰습니다. 그 곡들로는 ‘대구행진곡’, ‘대구소패’, ‘대구부민가’ 가 있답니다. ‘대구행진곡’과 ‘대구소패’ 는 1932년 1월에 콜럼비아 음반으로 발매되었고, 조선민보사에서 발매한 ‘대구부민가’는 1935년 4월에 빅타음반을 통해 널리 알려졌죠.

이 3곡의 노래는 우리의 전통적인 음악양식이 완전히 배제하고 만들어진 일본풍의 음악으로 대구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일본의 전통적 음 체계와 음악적 특징으로 작곡되었죠. 이렇게 일제는 음악에서 조차 우리의 민족성을 말살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민족적 저항시인 이상화 선생이 있었는데요. 그는 1926년에는 『개벽』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했으며, 1930년에는 <대구행진곡>이란 시가 『별건곤』에 실렸습니다. 


 

▲ 별건곤은 1920년대 대중잡지로서,

1926년 11월 창간호에 이상화의 시, 이기영, 박영희의 소설 등이 실렸다.

 



▲ 민족시인, 이상화 시인



이상화 시인은 대구 출생 시인으로 그의 조부 이동진은 항일개화운동에 전 재산을 바쳤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백부인 이일우 역시 항일투쟁 사업에 일생을 매진한 분이었죠.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정기를 익힌 이상화 시인 또한 독립을 위해 힘썼는데요. 1920년대 거의 유일한 민족적 저항시이자 애국시라 할 수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게 됩니다. 이 시는 일제 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혼을 담고 있는 시로 오늘날 많은 이들에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상화 시인이 1930년에 발표한 <대구행진곡>이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 역시 일제 강점기 하에 민족의 한을 느낄 수 있는데요. 함께 감상해 보실까요?




대구행진곡


이상화


  앞으로는 비슬산 뒤로는 팔공산

그 복판을 흘러가는 금호강 물아

쓴 눈물 긴 한숨이 얼마나 쌧기에

밤에는 밤 낮에는 낮 이리도 우나


반 남아 무너진 달구성 옛터에나

숲 그늘 우거진 도수원 놀이터에

오고 가는 사람이 많기야 하여도

방천뚝 고목처럼 여윈이 얼마랴


넓다는 대구 감영 아무리 좋대도

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

님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

앞뒤뜰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타


가을밤 별같이 어여쁜 이 있거든

착하고 귀여운 술이나 부어 다고

숨가쁜 이 한밤은 잠자도 말고서

달 지고 해 돋도록 취해나 볼 테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대구시민들의 한국적 정서를 없애고 일본화시키기 위해 일본형 대구노래를 창작하였고, 이를 보급하기 위해 앞장섰는데요. 이는 이상화 선생의 시가 대구 시민에게 널리 알려져 그들이 민족적 저항 의식을 느끼는 것에 대해 조선총독부가 느낀 위기의식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음악의 일본화를 통해 한국적 정서를 배제시키려 한 것이었죠.

특히 위와 같은 노래3곡에는 일본의 유명 가수가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제가 이러한 일본풍 노래를 보급시키는데 주축이 됐던 단체는 조선민보사였습니다. 



대구에 대한 조선민보사 일본인 사장의 회고담, ‘대구물어’


 

▲ 가와이 아사오

                            


1904년에 장사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대구로 왔던 가와이 아사오는 조선민보사를 맡아 경영하게 되었는데요. 조선민보사 사장으로 있는 동안 대구에서 보고 겪은 바를 ‘대구물어’에 남겼습니다. 1931년에 발간되었던 ‘대구물어’를 통해 당시 대구지역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엿볼 수 있답니다.



“박중양 관찰사서리의 뜻을 받은 이와세, 나카에, 사이토, 이토모토 네 사람은 극비리에 인부 60명쯤을 부산에서 데려와 하룻밤 사이에 성벽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치기영 치기영 치기영’ 하면서, 목도꾼으로 부르는 인부들이 큰 돌, 작은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한국사람은 원래 어깨로 물건을 메는 것이 아니라 등으로 물건을 져 나른다. 박 관찰사는 이때 처음으로 목도꾼이라는 이름을 들었고, 그 운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했다. 무거운 물건을 두 사람 이상이 나를 때, 일본사람들은 ‘영치기 영치기’라고 소리를 질러 호흡을 맞춘다. 한국사람들이 듣기를 ‘치기영’이라고 울렸는지 지금도 조선인은 첫 소리매김이 ‘치기영 치기영’이라고 나온다니까 우습다. 착각이라는 것이 재미있다.”


조선민보사 사장, 가와이 아사오가 발간한 ‘대구물어’ 中



한글 사전에 ‘영치기’는 ‘여러 사람이 함께 무거운 물건을 메고 갈 때, 힘을 맞추기 위해 내는 소리’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위 지문과 함께 본다면 ‘영치기’를 일본말의 잔재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외에도 일본말의 잔재라 여겨지는 말들이 우리 주변에는 일상적으로 쓰이고 있죠.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그만큼 일본의 문화가 우리 민족에게 깊이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노래 창작을 통한 일제의 민족말살


일제는 1931년 9∙18 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2개 사단에서 5개 사단으로 증가시켜 탄압무력을 강화시켰는데요. 이를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 민족을 말살시키려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1930년대 들어 우리 사회에는 더 큰 변화가 생기는데요.


 

▲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우리 민족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청에서 민원을 보는 한국 농민은 일본어를 사용해야만 접수가 가능했으며, 사립학교에서는 한국어 교육 및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었죠. 학교에서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으니 개인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들도 생겼답니다. 이에 대해 일제는 1935년부터 총독부령으로 농민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계몽운동 일체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1937년 당시에 우리 민족은 일상 생활에서 거의 한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일본어만을 사용해야만 했죠.


그리고 민족 고유의 언어를 못쓰게 하는 동시에 함께 이루어졌던 식민지화 정책이 바로 노래를 통해서였죠. 일제는 1931년부터 경성을 시작으로 각 지역을 상징하는 일본 노래를 창작하였고 한국시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는데요. 1931년 ‘경성행진곡’을 시작으로 다음해 1932년 1월에는 ‘대구행진곡’, ‘대구소패’를, 1935년 4월에는 ‘대구부민가’를 창작하여 대구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러한 민족을 분열시키고 기만하는 일제의 식민정책 앞에서 우리의 애국지사들은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살리고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더욱 힘썼습니다. 시인은 시를 통해,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민족의 독립의지를 표현하였고 민족을 계몽하고자 하였는데요. 우리들 또한, 우리의 것을 지키고자 했던 그 분들을 생각하며, 현재와 미래에도 그들이 물려준 우리민족의 문화를 계속해서 지켜나가고 발전시켜나가야겠습니다.



< 내용 출처 >

일제강점기 대구노래 고찰, 손태룡, 2013, 대구경복연구원

매일신문 기사 참조 (http://ka.do/L6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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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은 혹시 ‘이상화 시인’에 대해서 알고 계신가요? 이상화 시인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입니다. 이 시는 교과서에서도 실릴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시인데요. 정작 그 분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들 잘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상화 시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화 (1901~1943)

출처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조부대로부터 내려온 민족 혼


   이상화는 1901년 대구 명문가의 4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부 이동진은 항일개화운동에 전 재산을 바친 분이었습니다. 이동진은 전 재산을 반분하여 그 한쪽을 일가친척의 장학기금으로 쾌척했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경영하는 ‘우현서루’의 유지비로 충당하였습니다. 우현서루는 일제 침략에 분통을 느낀 이동진이 사재로 창설하여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의기를 기르던 지사 양성소였습니다. 곧, 우현서루는 우리나라 민족정기의 본원지였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1911년 민족정기의 말살책의 하나로 우현서루의 폐쇄를 강행하였습니다. 이동진은 그 후 얼마 안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화의 백부인 이일우 역시 부친의 유지를 그대로 전승하여 항일투쟁의 사업에 매진하였습니다. 이일우는 약전거리에 서점을 차리었는데 그것은 결코 영리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우현서루 서고에 산적해있던 많은 서적을 일반사회에 공개하여 신학문 보급에 도움을 주자는 동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미를 알아챈 일제 당국은 서점이 문을 연지 3~4년이 지나자 강제로 문을 닫게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일우는 다시 무료 교육기관인 강의원을 설립해 애국운동을 계속 하였습니다. 운영비는 모두 이일우가 조달했습니다. 그리고 강의원은 일제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어 민족의 의기를 고취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상화는 조부대로부터 내려오는 가훈에 따라 민족정기가 어떠하다는 것을 터득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대구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키다.


  이상화를 비롯한 4형제는 어려서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감화를 받으며 자라게 됩니다. 그는 백부가 경영하는 강의원에서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참뜻을 익혔는데, 1915년(15세)이 되어서야 비로소 신식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1919년에는 역사적인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에서 백기만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상화의 집 사랑방에 운동본부를 두고 면밀한 계획을 세워 계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여러 학교와 연락이 되었고, 교회 계통의 주모자들을 통해 성경학교와의 제휴도 이루어졌습니다.

  3월 6일, 그들은 8일 큰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시위행진을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7일에는 이상화가 선전문의 등사를 혼자 맡아서 하였습니다. 그리고 백기만의 지도아래 허범 등은 태극기를 3백 개나 박아내었습니다. 그러나 대구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일제 군경의 잔인한 탄압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주동자들은 모두 감옥으로 넘어가갔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이상화만은 용케 피해나가서 선전문을 뿌리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맹렬한 운동을 추진하다가 서울로 탈출하게 됩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1년 5월 경 헌진건의 소개로 동인에 가담한 이후부터 이상화는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기조로 하여 민족의 정서를 잘 다듬어 그야말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민족주의적인 시를 씁니다. 그의 시는 당시 1920년대로서는 거의 유일한 민족적 저항 시이고 애국 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26년에는 저항 시로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였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李相和)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개벽'지 6월호에 발표되었던 시입니다. 이 시에서 이상화는 민족적 비애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 하의 비극적인 시대 상황이 ‘빼앗긴 들’로써 표현되었고, 당시 상황에 대한 망국의 한과 절규가 담겨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다만 민족적 비애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민족정신까지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저항 시로 유명한 이 시는 일제 강점 하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민족의 혼을 담고 있는 시로 오늘날까지도 꾸준하게 읽혀지고 있습니다.



일제로부터의 탄압을 받다.


  1927년 이상화는 서울 생활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일제 경찰의 감시는 심하였습니다. 오히려 한층 더해져 여러차례나 가택 수색을 당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일제에게 원고도 모조리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행동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됩니다.

  또한 그는 우현서루 출신인 이종암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투척사건에도 관련이 있다 하여 구금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금될 때마다 그가 당한 폭행과 고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중국에서 항일독립투쟁을 하고 있는 이상화의 백씨 이상정장군이 모함에 의하여 일본의 밀정 혐의로 북경에 구금 되어있다는 소실을 듣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상정을 만난 후 귀국하였는데 일본 관헌의 혐의를 받아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여러 시에서 볼 수 있는 울분과 저항 의식은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계속된 고통으로 나온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남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이상화는 자진하여 3년 동안 교남학교에서 무보수로 영어와 작문을 지도하였습니다. 교남학교는 개편 확장하여 1940년에 대륜중학으로 재단이 확립되었습니다. 그는 대륜중학의 교가까지도 직접 작사를 하게 되는데, 일제는 이 교가가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감이 있다고 하며 사용 금지를 시킵니다. 그리고 대륜중학이 완전히 발족이 되자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힘쓰게 됩니다.

  1943년 이상화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이승을 하직하게 됩니다. 모친과 백부 및 백씨의 가르침대로 의롭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그리고 1948년 3월. 회원들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지게 됩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이었던 이상화.


  앞서 본 바와 같이 대일항쟁기에 있어서 그의 민족정신은 태생적인 요소에서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정적인 배경이 그러하였기에 그의 시 또한 민족주의적인 문학적 경향을 띄었던 것입니다. 그가 평생 철저한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적 저항의식을 굽히지 않고 투쟁하였던, ‘굳건한 의지’의 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현실에서도 문학에서도 그의 신념을 그대로 실천한 뛰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저항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문학 작품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0년대에서는 거의 유일한 저항시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그의 시로 인하여 단결할 수 있었고 같은 동질감을 느끼며 일제에 항거할 수 있었습니다. 피로 울분으로 쓰인 그의 마음속 외침이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의 시는 최고의 민족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일제 말기에는 많은 문인들이 절개를 저버리고 일명 ‘친일파’로 바뀌어 친일 작품을 쓰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화 시인은 죽을 때까지 그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지조를 지킨 시인입니다. 일제의 부당한 요구와 여러 차례의 고문과 수감에도 그는 끝까지 일제를 향한 저항의 화살을 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뛰어난 저항 의식은 지금의 우리가 배워야 할 나라사랑 정신에도 부합합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고 쉽게 살아가려고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갖은 고난에도 자신의 한 몸을 바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이상화 시인의 정신을 본받고,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출처 : 李相和硏究(이상화 연구) / 출판사 - 새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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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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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7.19 12:0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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