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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저는 이번에 인천 독립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는 인천시립박물관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인천시립박물관은 ‘인천 연수구 청량로160번길 26’에 위치해 있습니다. 서해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청량산 자락에 위치해 있고, 1946년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입니다.


▲ 인천시립박물관의 모습


개관 당시의 전시유물은 모두 364점이고, 그중에는 국립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대여한 유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인천시립박물관의 이모저모

 

박물관은 역사 1실과 역사 2실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1실에는 주로 인천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인천의 모습을 볼 수 있고, 2실에는 조선시대부터 근대기 인천의 역사와 생활 모습을 고문헌과 근대 유물, 모형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습니다.

저는 인천의 근현대사, 독립운동을 소개해 드리기 위해 2실을 위주로 돌아보았습니다.


▲ 전시관 내부 모습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만이었던 인천 지역에 일본 자본의 투자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930년대에는 교통이 편리한 인천 지역에 대규모 공업지대가 조성되었고, 부평을 중심으로 군수산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인천 각지에서 항일민족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 인천의 항만 모습


1919년 민족 최대의 항일 민족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나자 인천 지역에서도 자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4일간 동맹휴업을 하였고, 3월 7일에는 시내 곳곳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국공원 등지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습니다.

부평에서는 황어장터에서 약 3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강화에서는 기독교계가 주도하여 3월 18일 유봉진 선생의 주도하에 6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이 만세시위운동은 강화읍을 기점으로 강화도 전 지역과 부속된 여러 섬으로 전파되었습니다. 


▲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


일제강점기 말 인천의 항일 민족운동은 공장과 부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노동운동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됩니다.

항구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인천에는 노동자들이 많았고, 또 대부분의 자본가들이 일본인이었던 만큼 인천의 노동운동은 항일 민족운동의 형태를 띠면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이후 인천의 노동운동은 보다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며 일본의 자본가들과 대립하였다고 합니다. 


▲ 인천의 노동운동


인천의 독립운동은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지역 사회를 기반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지역 내에서 행해진 계몽운동과 연계되어 1930년대에 본격적인 항일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을 위해 희생, 헌신했던 선열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기사를 마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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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터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난 9월 15일은 67년 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맥아더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승기를 잡기 힘들었던 상황에서 전세를 역전시켜 6.25 전쟁의 판도를 뒤바꿔 놓은 날이었습니다.


저는 지난 주말 인천에서 이 작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전체적인 인천상륙작전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 인천시 연수구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가보았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모습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료는 무료이고 매주 월요일마다 휴관을 한다고 하니 가실 계획이 있으신 분들은 참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나라를 구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또 보존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념관은 전시관, 영상관, 야외전시장 그리고 부대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기념관에 도착하여 하나씩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 먼저 자유수호의 탑이 그 모습을 조금씩 드러냈습니다. 


 

 자유수호의 탑


자유수호의 탑 외에도 기념관 주변에는 다양한 것들이 전시되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미국 육군의 주력전투전차(MBT)로 사용된 이른바 ‘패튼 전차’의 하나인 M47 패튼에 이어 실제로 6.25전쟁 당시에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을 위한 한강 도하 작전에 사용된 LVT 상륙장갑차, 그리고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대공용으로 운용하였던 14.5mm 중고사기관총 ZPU-4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습니다.

 

 M47 패튼


 LVT(Landing Vehicle Tracked)


전시관의 입구에는 우리나라를 위해 함께 싸워준 유엔참전국의 국기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스탬프코너’라고 해서 맥아더 장군과 그 참모들의 사진이 담겨 있는 엽서와, 미국 전함 ‘미조리’호의 사진이 실려있는 엽서에 스탬프를 찍어 기념품으로 가져갈 수 있게 해놓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 전시관의 입구

 

전시는 6.25전쟁의 시작부터 정전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을 알려주며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기(1950. 6. 25 – 9. 14)부터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1950. 9. 15 – 11.24), 그리고 중공군 침공 및 재 반격기(1950. 11. 25 – 1951. 1. 24)와 전선교착 및 휴전(1951. 1. 25 – 1953. 7. 27)까지 상황이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인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6.25전쟁의 전개를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북한의 남침과 관련하여 서로 주고받은 문서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그 순간의 긴박함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 6.25전쟁 관련 문서

 

서울이 함락되고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장군은 한강 방어선을 바라보며 전선 상황을 파악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을 최초로 구상하게 됩니다. 그는 수원 쪽에서 북한군을 교착시키고 인천 부근에 미군을 상륙시켜 북한의 배후를 공격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가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인천상륙작전은 그 서막을 올리게 됩니다. 이 구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을 설치하여 수립된 ‘블루하트(Blue Heart)’ 작전계획은 남부전선에서 북한군과 정면돌파를 하는 동시에 미 해병이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하여 서울을 탈환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선 상황이 급속하게 악화됨에 따라 인천에 상륙하려던 미 제 1기병사단이 낙동강 전선 보강을 위하여 포항으로 가야함에 따라 이 작전은 취소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낙동강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격렬한 공세를 펼쳤지만, 국군과 미군은 총력을 다해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고, 이에 반격작전을 위한 새로운 상륙작전계획을 발전시키게 됩니다. 


북한군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꾸준히 느꼈던 맥아더 장군은 블루하트 작전계획 이후에도 크로마이트 작전계획, 인천 상륙 계획을 세우고 인천 지역의 지리적 조건을 따져가며 점점 인천상륙작전을 구체화시켜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6.25전쟁 당시, 매우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던 우리나라의 전시상황을 뒤바꾸기 위하여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구상한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입니다. 그 계획은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 낙동강 전선에서 총 반격을 하여 북한군을 무찌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인천 지역의 엄청난 조수간만의 차와 병력, 탄약 그리고 보급품의 운송조차 어려웠던 좁은 수로의 악조건을 극복하고 서울을 수복하며 전세를 역전시킨 역사적인 작전입니다. 

 

 맥아더 장군


이렇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 외에도 기념관 안에는 6.25전쟁에서 육군, 해군, 공군 등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 싸워준 많은 분들의 기록과 전시물품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 화염방사기, 60mm박격포탄 etc


저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 탐방을 마친 후, 곧장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공원 입구에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이 있었습니다. 이 기념탑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되자 학도들이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 유지에 힘쓰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다시 위기에 처하자, 같은 해 12월 18일 남녀대원 3,000여명이 집결하고 마산까지 남하하여 해병대로, 또 육군으로 자원 입대한 이후 수많은 전투에서 200여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자유공원 입구에 있는 인천 학도의용대 호국 기념탑

 

1883년 인천이 개항하고 5년 후인 1888년 11월 9일에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으로 설정된 자유공원은 맥아더 동상을 중심으로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석정루 등 한국의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으며 외항을 둘러싼 섬들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처음의 명칭은 만국공원이었고 후에 일본인들이 서공원으로 호칭하였으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수복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가장 먼저 상륙을 단행한 사적지임을 기념하여 1957년 개천절을 기해 동상을 세우고 자유공원이라고 개칭하게 된 것입니다. 

 

 자유공원 맥아더장군 동상


자유공원 다음으로는 1945년 창설되고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던 해군첩보부대(UDU) 부대원들의 희생과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해군첩보부대 충혼탑이 있는 월미공원으로 향했습니다. 



 해군첩보부대 충혼탑


해군첩보부대 충혼탑은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부대는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영흥도 탈환, 팔미도 등대 확보공작을 성공시키는 등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특수임무 중 산화한 350위의 영령들을 기리기 위하여 2011년 11월에 이 충혼탑을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천상륙작전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국군과 유엔군이 함께 힘을 합쳐 지켜낸 우리의 평화와 자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전쟁의 상흔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전개되어 서울을 탈환하고 나아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이후 분단된 우리 민족과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해결해야할 많은 과제들이 아직 남아있음에 마음 한 켠이 많이 아립니다. 우리나라의 아프지만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더욱 마음 속에 새겨야겠습니다. 


*참고

인천상륙작전기념관 http://www.landing915.com/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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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수세에 몰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는데요.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호국영웅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게 뒷받침해준, 엑스레이 작전에 대해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 6.25전쟁의 대반전, 인천상륙작전


▲ 인천에 상륙한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들 (출처: 타임트리 블로그)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고, 유엔군이 참전하여 국군과 함께 전투를 벌였지만 끊임없이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에 방어전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에 연합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결단을 내리게 되는데요.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전선 곳곳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적진지의 배후, 인천을 칠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이 같은 그의 결정에 미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는데요.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하기 에 부적절한 곳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첫 번째 불리한 요건은 인천 앞바다의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상륙작전 개시 시기인 9월의 경우 15일부터 3일간이 가능하고, 이때를 놓치면 다음 한 달을 기다려야 했었습니다. 또한 상륙 가능 날짜에도 밀물이 꽉 들어차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각각 3시간 정도의 제한된 시간 내에 작전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 인천으로 향하는 연합군 함대 (출처: 국가기록원)


두 번째로는 인천항이 대규모의 함대가 자리 잡기에는 협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항구에 이르는 해상 접근로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인천항에 앞서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했으므로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외에도 높은 벽의 상륙해안을 기어오르기가 어렵고 이를 극복해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는 시가지에서 적과 교전해야 한다는 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미합동참모본부는 인천이 아닌 다른 상륙지를 선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모두가 만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선택한 것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이유가 적군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국군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북한군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공격하면 전략적으로 기습효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북한군은 인천 지역에 허술한 방비태세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 인천시내에 들어온 연합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해병과 보병 각각 1개 사단을 편성하고 한국군을 각각 1개 연대씩 배치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된 한국인 총병력은 13,000여 명이 넘는 인원으로 이들은 인천시가지에서 적을 소탕하고 민간인 복장으로 숨어 있는 적을 모두 색출해내는 등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이로써 9월 15일 새벽부터 개시한 상륙작전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약 3일 후에는 김포와 영등포 방향으로 진출하여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국군은 서울 이남의 모든 지역을 되찾았고, 북으로 진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숨겨진 사전작전, X-RAY작전


▲ 켈로부대 대원들 (출처: 브런치 블로그)


그러나 이 인천상륙작전,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가 시행되어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의 계획을 세우던 중, 인천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급제동이 걸리게 되었는데요. 이에 맥아더 장군은 당시 해군의 총참모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에게 인천지역의 북한군 배치 현황, 보급선과 보급 현황, 해로의 기뢰 매설 여부, 상륙 지점의 지형, 인천항의 안벽 높이, 밀물과 썰물 때의 해안 길이, 북한군의 방어진지 상황 등을 탐지해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예비 작전, 엑스레이 작전(X-Ray Operation)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작전에서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KLO)부대는 인천에 잠입하여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켈로(KLO)부대는 ‘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 1949년 주한미군이 전투 병력을 철수하면서 첩보 수집을 위해 창설한 비정규전 부대입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켈로부대는 첩보부대의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연합군과 국군 간의 의사소통도 담당하는 중요역할을 했습니다.


▲ 임병래 중위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켈로부대는 임병래 중위를 포함한 해군 장교와 민간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소수정예부대로, 인천 인근에 배치된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바다에 떠 있는 지뢰를 제거했으며, 상륙 지점 지형 등의 정보를 파악했습니다. 정보를 모으기 위해 부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북한군으로 위장하거나 민간인 인척 시내에 잠입했습니다. 또한 해안의 북한군 방어 태세 확인을 위해 어부로 가장하기도 했는데요. 


▲ 홍시욱 하사 동상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잠입했던 부대원들은 인천상륙작전 전날인 14일, ‘모든 일무를 끝내고 철수하라’는 명을 받고 인천 영흥도에서 철수 준비를 하던 중 북한군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 중 부대원들을 탈출시키는 과정에서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 포위되고 마는데요. 이에 임중위와 홍하사는 자신이 잡히면 기밀이 유출될 것을 우려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팔미도 등대 (출처: 현충시설정보 서비스)


첩보부대원들의 작전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닌데요. 인천상륙작전 당일, 켈로부대의 부대장 최규봉 대장은 켈로부대를 이끌고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 팔미도에 잠입하여 등대를 사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등대의 연료탱크와 등불 받침을 연결하는 중요 부품이 사라져 불을 켤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요. 약 2시간에 걸친 수색 작업에도 사라진 부품은 찾을 수 없었으나 기적적으로 어둠속에서 부품을 발견하면서 등대의 불을 밝혀 맥아더 장군과 연합군 수만 명을 태운 함대가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67년 전 오늘은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났던 역사적인 날입니다. 보통 ‘인천상륙작전’ 하면 맥아더 장군이나 연합군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요. 성공 확률이 5000:1로 매우 희박했던 이 작전의 배후에는 목숨을 걸고 노력했던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 또 이들을 도우며 영흥도에서 활약했던 무명 용사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나라의 숨은 영웅들을 생각해 보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참고자료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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