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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 17일은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지 7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를 기념하여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한국광복군의 창설 과정과 활동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이후, 전국적으로 외교권 박탈에 대해 저항하는 수많은 움직임이 있었는데요. 일본은 이를 강하게 압박하였고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는 치욕의 경술국치일을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1919년,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3월 1일을 기점으로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습니다.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의장 이동녕 선생을 중심으로 안창호, 김규식 선생 등이 모여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 기념사진 (출처: 우리역사넷)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군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수립 초기부터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 등을 제정하고,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전쟁을 위한 군대 편성을 계획하였는데요.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의열투쟁(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등)에 대한 일본의 대대적인 탄압과, 1937년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 중국 각처로 옮겨 다니며 험난한 대장정을 펼쳤고, 1940년 충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모든 어려움을 딛고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전례를 가짐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국군,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 당시 김구 선생이 발표한 <광복군 선언문> 중


▲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이 만든 한국광복군 영문약자 KIA(Korea Independence Army)

(출처: 독립기념관) 


# 한국광복군의 활약


광복군 창설 직후 편제된 지대는 병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임시정부는 총사령부 예하에 4개 부대를 편성하여 본격적으로 병력을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출처: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블로그)


대원들은 중국 각지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광복군의 활동 취지를 알리며 병력을 모집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한국광복군은 창설 1년여 만에 12명의 인원에서 3백여 명의 병력으로 원대한 골격을 갖춰나갔습니다.


▲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 당시 연설을 하는 백범 김구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한국광복군은 1941년 2월부터 기관지 <광복(光復)>을 발간하여, 선전과 홍보 활동을 이어갔는데요.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로 발간하여 한국어본은 중국 내 교포들을 대상으로, 중국어본은 각급 행정기관과 학교, 군사기관, 언론기관 등에 배부하였습니다. 이를 전·후방에 확산하여 국내외 동포들의 지원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군에 징병되어 온 한국 청년을 유치하는 데에도 힘썼습니다.


▲ 한국광복군과 미군 (출처: 준형, 시현이네 퀴즈사랑)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2월 10일, 즉각적으로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는 전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지를 알림과 동시에,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우리들은 3천만 한국인 및 정부를 대표하여 중ㆍ영ㆍ미ㆍ하ㆍ가ㆍ호(中ㆍ英ㆍ美ㆍ荷ㆍ加ㆍ濠) 및 기타 제국의 대일선전을 삼가 축하한다. 그것이 일본을 격파하고 동아(東亞)를 재조(再造)하는 데 가장 유효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특히 아래와 같은 점을 성명(聲明)한다.


1. 한국 전체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전선에 참가하여 1개 전투 단위가 되어있으며 축심국(軸心國)에 대하여 선전(宣戰)한다.

2. 거듭 1910년의 합병조약 및 일체(一切) 불평등조약의 무효와 동시에 반침략국가들의 한국에서의 합법적인 기득권익을 존중함을 선포한다.

3. 왜구를 한국과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

4. 맹세코 일본의 난익(卵翼) 하에서 조성된 장춘(長春) 및 남경(南京) 정권(正權)을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즈벨트ㆍ처칠 선언의 각 항(各項)이 한국의 독립을 실현하는 데에 적용되기를 견결(堅決)히 주장하며 특히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예축(豫祝)한다.


대한민국 23년 12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음.


이후 한국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1943년부터 1945년에 걸쳐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했고, 이후 영국군과도 연합하여 인도·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한편, 일본과 연합했던 이탈리아와 독일이 항복하며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는데요. 일본이 패망의 길로 접어든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군과 손잡고 국내진공작전을 펼치기로 했는데요.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한미연합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미국 전략 사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에 보내 정예요원으로 훈련시켰습니다. 


▲ OSS 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들


국내진공 침투작전의 실시 일자는 1945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우리 힘으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있던 8월 15일, 아쉽게도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 민족은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한국광복군의 국내진입작전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면서 우리의 힘으로 나라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을 자아냈는데요. 


▲ 조선의 독립에 환호하는 모습 (출처: 국가기록원)


오는 9월 14일(목) 오전 11시, 백범 김구기념관에서 (사)한국광복군동지회(회장 이영수) 주관으로 <한국광복군 창군 제77주년 기념행사>가 열립니다. 이날 행사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을 비롯한 각계인사, 광복군동지회원, 시민, 학생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될 예정입니다. 


비록 이들이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은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무장독립운동의 중심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안위를 위해 노력했던 그들의 헌신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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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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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9.21 17:5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황청묵

    2017.09.23 03:0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오늘 고엽제전우회 국가보훈정책 ?(양승조,이완영,홍철호)토론회에 참석하여 10시부터 13시30분간 자리를 지켜 발제자의 주제발표에 점심도 시간경과로 먹지못헸다, 국가보훈의 정책 방향에 우선되여야 한다고 공감하였다,월남전에도 파병의 임무수행도 무사히 끝마치고 지금은 건강상태도 고엽제의 질병으로 고통스러워 한다,
    한국 광복군 창군77주년 창설과 활약상에 의미심장해하며, 공감했다, 동참하였다, 국가안보를 휴전선언이후 남북관계는 북한의 핵무기화를 선어하여 국민의 정치적 국가안보를 위협한다, 뉴스보도및 문재인 대통령 유엔연설에서도 평화를 외쳤다, 구한말의 선비 매천 황현 선생을 귀감으로 생각한다, 경제적 발전은 국가경제에 지속가능하다고 본다,
    국위선양과 민주국가의 세계화에 동참하는 월남전참전에 희생하였던 국가유공자의 참전전투수당지급을 긴급동의합니다, 감사합니다,

  3. 황청묵

    2017.09.23 03:3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017년 9월22일 국회의원회관 토론회 참석하다, (양승조국회의원 제안법률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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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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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파노

    2017.08.29 15: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체적인 내용은 어디서 확인가능한가요??

  2. 7급상이군경

    2017.08.30 17:0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군작전중 사고로 중증희귀난치병걸린 7급 유공자입니다 7급의 처우개선 아무것도 나와있지았더군요 광화문1번가에서도 보상금현실화가 많은 관심을받았지만 이정책은 없던것으로된건가요?
    군대에서 다치면 본인만 병x되서 장애인보다 못한대우받는 처우개선언제될까요‥?
    가족 의료비지원, 교육지원 차별대우는 왜받는건가요? 따뜻한보훈 정말좋습니다 헌데 상이유공자중 7급한테는 전혀 따뜻하지 않은것같습니다 에휴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독립을 위해 애쓴 수많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억하고 그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몫일 텐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을 뒷바라지하고 나라의 독립을 염원했던 정정화 선생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왼쪽 첫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기록원)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난 정정화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910년 가을 대한협회의 회장을 지냈던 김가진의 아들인 김의환과 혼인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가족사진 (출처 : 눈&귀 블로그)


개화파 집안에서 성장한 남편 김의환의 영향으로, 정정화 선생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국제 정세에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정정화 선생에게 우리나라에도 독립의 기회가 올지 모른다는 민족의식이 일깨워진 계기가 되었는데요.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을 목도하고 그 이후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환을 따라 상해로 망명하면서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1920년 1월, 정정화 선생은 서울에서 출발하여 의주, 봉천, 천진, 남경을 거치며 열차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도착하게 되었는데요. 먼저 망명해 있던 가족들과 재회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 조달의 임무를 받고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정정화 선생의 활약이 시작되었는데요. 선생은 일본의 감시가 비교적 심하지 않은 여성의 신분을 이용하여 무려 6번이나 국내를 왕복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게 됩니다.

 

▲ 정정화 선생과 그녀의 아들 (출처 : 국가기록원)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1922년 6월 중순, 세 번째로 밀파되어 압록강을 건너던 정정화 선생 일행이 일경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던 것인데요. 조사를 받고 풀려난 정정화 선생은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다시 상해로 갔습니다.


1924년 12월, 정정화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에 잠입하여 이듬해 6월 상해로 돌아왔습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대립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국내외 동포들의 재정적인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요. 힘겨운 시기였지만 정정화 선생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하고 부상을 돌보는 등 임시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하며 그들과 함께하였습니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감시와 압박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하게 되는데요. 이 때 정정화 선생 가족 또한 이동녕, 김구, 엄항섭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따라 이동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 임시정부 요인들과 정정화 선생 가족_앞줄 왼쪽 두 번째 정정화 선생 (출처 : 국가보훈처)

 

1934년 정정화 선생은 한국국민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으며, 1940년에는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당요원으로도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선생은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고 그 간부로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요. 1941년에는 임시정부의 보호 아래 있는 중경의 3.1유치원의 교사로 임명되어 독립운동가 자녀들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이 당시 임시정부의 안살림은 정정화 선생이 도맡아 하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자, 1938년 6월 각 당의 대표들이 남목청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운환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정정화 선생은 이 때 총상을 입은 김구,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선생 등을 간호하며 뒷바라지하였습니다. 1940년 3월 초 임시정부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석오 이동녕 선생이 71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을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도 바로 정정화 선생이었습니다.

 

▲ 한국혁명여성동맹창립총회 기념사진 (출처 : 국가보훈처)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정정화 선생은 각 정파의 부인들과 함께 여성 차원의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대한애국부인회의 재건조직에 참여하였습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는데요. 훈련부장에 선출된 정정화 선생은 국내외 한인 부녀의 단결을 위해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 여성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위문 금품을 거두어 일선에 있는 독립군을 위문하였으며 적진 중에 끼어 있다가 포로수용소를 통해 넘어오는 동포 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하는 등 분주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이와 더불어 정정화 선생은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 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돕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정정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습니다.

 

▲ 정정화 선생 초상 (출처 : 국가보훈처)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정정화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그녀가 보여준 헌신은 우리의 마음에 큰 울림을 줍니다. 김구 선생은 그녀를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칭송했다고 합니다.「녹두꽃」에서 선생은, “어린아이가 집 밖에 나가 놀 때도 어머니는 늘 집안에 계시듯 조국은, 잃어버린 조국은 늘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고 임시정부에서 교육 등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애썼던 정정화 선생. 그리고 힘겨운 시기에도 그녀가 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조국,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애쓴 분들이 되찾은 이 땅에서, 독립운동가 한 분 한 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사이트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44766&cid=40942&categoryId=34465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69904&cid=59011&categoryId=59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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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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