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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일(금) 오전 10시, 백범김구기념관 앞 야외광장에서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기념식은 독립유공자 및 유족, 각계대표, 시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기념식은 9년 만에 야외에서 개최되어, 우리 후손들이 선열들을 애도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하늘로 울려 퍼지는 듯했습니다. 

기념공연에서는 임시정부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꾸며 감동을 그대로 전달받았던 특별한 기념식이었습니다.


▲ 식전행사


식전행사로 학생들이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임시정부 요인과 수많은 분의 헤아릴 수 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제가 이 공연을 보고, 의미 깊은 날을 기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벅차올랐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


식전행사가 끝나자 이낙연 국무총리가 입장하여 독립유공자 후손, 피우진 국가보훈처장과 함께 임정 요인 묘역을 참배했습니다.


▲ 임시의정원 개최에 관한 뮤지컬


개식 이후 ‘임시의정원 개최’에 관한 뮤지컬이 있었습니다.

임시의정원 개최과정에 대해 다룬 뮤지컬로, 부족하게 알고 있던 부분들에 대해 더욱 정확히 알게 되었고, 제가 그 당시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한 그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다는 부분에서 전율이 흘렀습니다. 각종 스포츠경기, 일상생활에서 익숙하게 입에 담고 써온 우리나라의 이름이 대한제국을 계승하고 국민을 근간으로 한다는 깊은 뜻을 가졌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어 감동적이었습니다.


제가 감명 받았던 내용 중 하나는 ‘11’이라는 숫자였습니다.

뮤지컬을 통해 실제 99년 전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 4월 11일 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정부는 1990년부터 4월 13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해 왔습니다. 하지만 4월 13일이라는 근거가 되는 ‘조선민족운동연감’ 자료가 사실과 차이가 나며 체계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13일이 아닌 11일이라는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서 임정수립일에 대한 논란은 지속됐습니다. 이 논란은 이번 기념식에서 4월 11일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로 바로잡음으로써 종식되었습니다.


그 뒤 박유철 광복회장의 대한민국 임시헌장 낭독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의가 담긴 그 내용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국민의 신임으로 완전히 다시 조직한 임시 정부는 항구적이고 완전한 자주독립의 복리에 우리 자손 만민에게 대대로 계승하게 하려고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 헌장을 선포한다.”라는 전문을 들었을 때는 그 내용이 지금까지 이어져 있는 듯하여 임시정부가 우리 민족의 뿌리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 국기에 대한 경례


▲ 애국가 제창


▲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


이후 국민의례가 진행되었습니다. 공식적인 행사에는 빠지지 않는 국민의례이지만, 조금 특별한 점들이 있어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로는 교향악단의 연주였습니다. 국민의례는 수없이 많이 해왔지만 교향악단의 연주로 국민의례를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음색이어서 이 또한 기념식을 관람하는 즐거움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불렀다는 것입니다. 애국가를 부르며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세 번째로는 어린 아이들이 선도하여 애국가를 불렀던 것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애국가를 함께 따라 부르자니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 이낙연 총리의 기념사


그 다음으로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기념사가 있었습니다.

기념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에 대해서 말씀해주신 부분이었습니다. 상해에 도착한 날에, 동포의 집에서 담요를 깔고 잠을 잤다는 일화에서 저는 임정 요인들의 시련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내년부터는 임시정부수립 기념식을 11일에 진행할 거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이낙연 총리의 기념사가 끝난 후 좌중은 큰 박수갈채로 화답했습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축하가를 부르는 모습


▲ 만세삼창


이후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 축하가’가 제창되고, 참석자 모두 일어나 만세삼창을 하며 기념식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수많은 시민, 뮤지컬 배우, 학생 공연단원들이 어우러져 부르는 노래와 만세삼창은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유난히 푸르던 하늘 아래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삼창을 부른 경험은 제게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영상 속 김구 선생의 선창에 따라 만세삼창을 부르니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수많은 분들이 목 놓아 불렀던 만세 삼창을 오늘날에 이르러 부르는 것은 정말 남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많은 분이 함께 태극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며 뭉클해져 왔습니다. 과거 선열들의 헌신을 잊지 않고, 후손으로의 도리를 다하고자 많은 분들이 모인 모습에 감격스러웠습니다.



감동적인 기념식의 여운이 남아서였을까요? 많은 분들이 기념식이 끝나고 나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중 한 분에게 인터뷰를 부탁드렸습니다. 


Q. 오늘 기념식 어떠셨나요? 

A. 작년까지는 계속 행사가 실내에서 진행되었는데, 오늘 밖에서 이렇게 여러 공연과 함께 진행되니 재미도 있고, 좋았던 것 같습니다. 하늘도 이 날을 아는지 비도 오지 않고 날이 화창해서 아주 좋았습니다.

Q. 오늘 행사에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참여하셨나요?

A. 과거에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겠지요. 우리나라를 위해 힘써주신 조상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석하였습니다.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A. 대한민국 파이팅입니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과거에 임시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리고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번 기념식에 참석하여 명확하게 느꼈고, 그런 감상을 인터뷰를 통해 다른 분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어 뜻 깊었습니다. 이번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은 우리 안에 공통의 감상과 기억을 마련해준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과거 많은 시련과 아픔이 있었지만 지금 이렇게 기념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는 게 얼마나 기쁜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2019년, 내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앞으로도 우리의 뿌리, 우리의 정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속해서 기리고,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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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올해로 수립 99주년을 맞이했습니다.


▲ 1919년, 미주 대한인국민회 발행 대한독립선언서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만세운동을 계기로 보다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상해에서 수립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까지 27년간 임시정부는 어떠한 역사를 겪어왔을까요? 오늘은 훈터 독자 여러분들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출처: 독립기념관)


 

역사의 시작,

중국 상해(상하이)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1919년 당시 상해는 프랑스 조계지(외국인 거주 지역)였기 때문에 외부와 연락이 쉽고 비교적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먼저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주요 독립운동 인사들이 상해로 모여 정부 조직에 대해 논의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습니다. 이어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국무총리와 내무부, 외무부 등 정부 조직이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상해에서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을 통합하고 지휘하기 위한 기구로 교통국을 두고 연통제를 실시하였으며, 파리강화회의에 임시정부의 전권대사로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활발히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 주요 인사와 기관에 대한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라는 큰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 윤봉길 의사 (출처: 독립기념관)

 

이동 시기


그러나, 의거 이후 심화된 일제의 감시로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만 했고, 항저우(1932) 전장(1935) 창사(1937) 광저우(1938) 류저우(1938) 치장(1939) 등 중국 대륙 곳곳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운하 위의 배를 거처로 삼는 등 피난 생활을 겪기도 했습니다.



▲ 1935년 진강,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출처: 독립기념관)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임시정부는 중국정부의 지원을 받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개설하여 청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하였습니다.

 

 

다시 시작된 임시정부 정착 시기,

중국 중경(충칭)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도착한 곳은 중국 중경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부터 해방까지 약 5년 동안 중경에서 정착하게 됩니다. 중경에서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힘을 키우기 위해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라는 통합 정당을 창당하였습니다.


한국독립당 통합을 기반으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한국광복군은 총사령 지청천, 참모장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직할군대로서, 창설된 지 4개월만에 1백명이 넘는 병력을 갖추기도 했습니다. 


▲ 1940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설 기념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1941년 12월 10일, 임시정부는 일제에 대해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고, 1945년에는 광복군과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와 합작하여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임시정부는 기나긴 해외에서의 독립투쟁을 끝내고 마침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 중경 청사에서 촬영된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 이후 집무실로 사용한 경교장 (출처 : 독립기념관)



오는 4월 13일, 국내외에서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이 열립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나라를 빼앗긴 시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독립을 염원하며 모두의 힘을 한데 모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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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농법

    2018.04.07 16: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주관 할 자격이 없다. 본인은 수년에 걸처 수차례에 걸처 민원과 신문고, 정책제안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4월 13일이 아닌 4월 11일자 임을 설명하고 각종 근거를 밝혔다.
    먼저 4월 11일자임을 증명하는 문헌으로 보훈처가 99년도 임시정부법령집을 한시준교수의 책임연구자로 하여 정리 한바 있다. 임시헌장 선포문(1919. 4. 11자)에서 "임시의정원의 결의로서 임시헌장을 선포하노라'이라 하였다. 또한 제6회 의정원 회의 임시헌법(1919. 9. 11) 선언문 내용은 " 인민을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민의를 체하야 원년 4월 11일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으로 삼아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동 헌법 제8장 보칙58조는 본임시헌법은 공포일보 부터 시행하고 원년 4월 11일에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본 헌법 시행일로 부터 폐지 함, 또한 동 헌법에 대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회의 국무원 총무국 국무총리 이승만의 명의로 하여 발행하였으며 내용또한 동일하다. 또한 임시헌시약헌(1927, 4, 11) 제5장 보칙 5조의 내용에 대한민국 9년 4월 11일부터 시행하고 대한민국 4월 7일 공포한 임시헌법은 동시에 폐기함 등과 같이 4월 11일자에 공포(발포)등의 내용으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명확히 하고 있으나 수차례의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임시정부 법령을 검토, 및 거론한 사실이 없이 중국 등지에서 이루어진 기사내용을 근거로 학술회의를 하고 있으니 국민을 설득하는 자료가 미흡다는 이유가 된다. 필자의 주장이 공무원의 책상속에 또는 쓰레기 통에 버렸다는 생각에 배심감과 모멸감이 앞선다. 국가보훈처의 직무유기, 독립기념관의 연구원들은 지금껏 무엇을 하였는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을을 조선민족운동연감의 문헌를 근거로 하였다고 한다, 필자는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 13일자는 한일관계사료집을 인용하였지만, 한일관계사료집의 4월 11일자에는 임시정부수립일의 내용이 들어 있다, 4월 13일자는 이현회 교수등 국사편찬위원회 자문단이 세심한 연구와 검토 없시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선포(공포/발포)한 날이라 판단하고 각종 전문서적에 인용하여 고착화 된 날이다.

    근거적 이유는 조선민족운동 연감의 4월 10일자와 11일자의 내용은 제1회의정원 회의 내용과 뒤바뀐 사실이며, 4월 13일자는 임시의정원 소집일 아니라는 점이다. 4월 13일자의 기록은 제2회, 제3회의정원 회의 내용이 기록 되어있다. 내용이 변질 된사실은 제2회의정원회의 ( 4월 22일자 ) 안건에 본국에서 국민대회를 개초하니 이미 상해에서 임시정부(의정원)의 성립을 알려야 한다는 결의 내용이 조선민족운동연감의 4월13일자에 내외에 독립정부성립을 선언하고 라고 기록하였고 이를 학자들이 세심한 검토없이 해석하여 공포일이라 설명하고 있다 , 이현회교수와 일부교수, 보훈처 마져 4월 11일은 제정일이고 4월 13일은 공포한 날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본인은 이러한 구체적인 내용을 수차례 근거문헌과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보냈지만 무지한 학자들의 의견만 고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올해 1~2월중 국무회의에 상정하고 법제처의 검토, 행자부의 협조등의 절차를 걸처 국무회의에 통과 되어야 한다고 절차를 설명하였고 2019년 달력과 각종 수첩이 제작 되기 전인 3월 전에 꼭 행정절차의 필요성까지 설명해 주었다.

    이러한 민원인의 노력을 무시하고 올해도 4월 13일자에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진행하겠다는 사실로 보아 담당공무원이 무능한것인지, 조직 자체가 문제가 있는건지 궁금하다.

    국가보훈처는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자뭇 궁금하다,
    지난 3월 26일 귀처주관 독립기념관 주관으로 국회소회의실에서 학술회의를 진행 하였지만 그동안 한시준교수의 주장에 1922년 월력(달력)과 사진의 근거가 전부였다, 다행이도 이만열 교수가 보창로 329호 청사에서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국호와 관제, 임시헌장을 제정하여 선포하였다는 논고를 발표 하였다, 그동안 국가보훈처와 한시준교수는 보창로 329호 청사를 부인하고 있었기에 반가운 내용이였다. 한시준 교수는 2004년 12월에 독립기념관의 학술용역으로 보창로329호 청사를 부인하는 용역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편협한 내용, 제한된 자료, 문화부, 독립기념돤의 보고서를 필요한 내용만 인용하고 부정적인 내용으로 학술용역의 저의를 의심하도록 기술되어 있다.

    본인을 비롯한 이수봉교수등은 각종 문헌에 보창로 329호청사가 임시정부최초청사임을 확인 할수 있는데 어찌하여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한시준 교수는 이러헌 내용을 찿아 볼수 없다.
    상해임시정부수리기념일의 장소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여 야한다. 이러한 내용은 임시정부수립 100주년를 정점으로 소상히 밝혀 주기 바란다.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의 법적인 근거는 임시헌장과 임시헌법의 각조문을 검토하시고, 잘못된 사실을 국가보훈처와 국사편찬위원장은 공동으로 사과를 해야 하며, 빠른 시일에 행정절차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완연한 봄이 된 4월. 따스한 봄을 맞아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윤현진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차장으로 취임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 윤현진 선생


윤현진 선생은 1892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선생은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을 탐방한 뒤,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 유학을 떠났습니다.


선생은 메이지 대학에서 수학하며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모여 만든 단체인 조선유학생학우회와 신아동맹당에서 활동하며 반일운동에 앞장섰습니다.


▲ 조선유학생학우회에서 발행한 『학지광』 창간호 속표지 (출처: 독립기념관)


1916년 귀국한 윤현진 선생은 약 3년 동안 대동청년단, 백산무역주식회사, 의춘상행(宜春商行), 기미육영회 등과 관계를 맺고, 우리 민족이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끔 비밀결사운동, 경제적 자립운동, 교육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 백산무역주식회사 (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월 21일. 3.1운동이 일어난 직후 윤현진 선생은 상하이로 망명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위원과 경상도위원을 맡았고, 국내 항일세력과 연락을 위한 의용단을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만드는 등 임시정부의 중심인물로 부상하였습니다. 


▲ 1920년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출처: 독립기념관)


또한, 윤현진 선생은 1921년 2월 임시정부의 중책인 재무차장이 되어 살림을 책임지게 됩니다.

독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선생은 안타깝게도 같은 해 9월, 과로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였습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왼쪽 뒷줄 2번째) (출처: 독립기념관)


아마도 위의 사진은 보신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는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임시정부의 행정부) 성립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된 것인데요,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은 안창호 선생의 뒤편, 왼쪽 뒷줄 2번째에 있습니다. 


위 사진의 윤현진 선생이 유난히 다른 분들에 비해 앳된 모습인 걸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선생은 27세의 젊은 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글을 보는 분들에게 어리거나 많은 나이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젊은 나이에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 상해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러진 윤현진 선생의 장례식 (출처: 독립기념관)


선생의 장례는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160여명의 내빈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생을 추모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윤현진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 선생의 큰형 윤현태가 한글 자필로 비석을 세운 윤현진 선생의 묘 (출처: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무차장으로서 젊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투신한 4월의 독립운동가, 윤현진 선생을 함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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