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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를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中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6.25전쟁 중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감동적이었던 작전,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 메러디스 빅토리 호


# 6.25전쟁 발발


1950년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우리 국군은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5일, 국군은 유엔군과 함께 바다를 통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전세는 역전되는데요. 이때부터 북한군을 몰아내기 시작했고,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기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는데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또 중공과 러시아가 있는 두만강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1950년 11월 말, 1만 5천여 명의 미 해병대 1사단이 압록강 근처의 장진호까지 나아갑니다. 통일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던 그때, 중공군이 30만 군대를 이끌고 장진호를 포위합니다.

이러한 돌발 변수 앞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추위까지 우리 국군과 유엔군을 급습했는데요. 당시 장진호는 영하 40도로,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곳이었습니다.

장진호의 칼바람 아래, 밀고 밀리는 피의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했으며, 전사자들의 시신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등 생지옥이 펼쳐집니다.


결국 북진 계획은 재검토되었고 장진호의 전 부대는 함흥으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장진호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흥남으로 향합니다. 


# 피난민들과 함께 철수한다! 흥남철수작전


당시 흥남 부두에는 군인을 비롯한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1950년 12월 15일에서 24일까지 열흘간 흥남철수작전이 펼쳐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배에 탈 수 있는 건 군인, 그리고 무기와 장비뿐이었습니다. 

철수를 위해 이동해야 할 병력만 10만 5천여 명, 수송해야 할 물자로는 만 7천여 대의 차량과 35만톤의 군수 물자, 그리고 탱크 등이 있었습니다. 또 흥남 지역에는 군인과 군수 물자 이외에도 20만여 명의 피난민들도 있었지만, 당시 흥남철수작전 계획에는 민간인 이송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병력과 군수 물자를 수송하기에도 벅차므로 민간인은 데리고 갈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흥남부두에 몰려든 인파 (출처 : 전쟁기념관)


그러나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국군이 북진할 때 환호하던 지역 주민들이 반동으로 몰려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피난민들의 수송 지원 협조를 요청했고, 미 제10군단에서 군대와 주민들 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서인 민사부 고문을 맡고 있던 현봉학 박사도 알몬드 소장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 현봉학 박사


“제발 우리 국민들을 도와주세요. 저 사람들을 여기에 두고 가면 중공군에게 몰살당할 것입니다. 저 사람들을 태워주세요.”

 

국군 지휘관들도 가세하여 피난민들과 함께 철수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하였습니다.


“만약 피난민을 승선시키지 않는다면 국군은 그들과 함께 육로로 내려가겠습니다. 국군은 피난민을 안전하게 돌봐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탄복한 알몬드 소장은 피난민들과 함께 철수할 것을 명령합니다. 흥남철수작전에는 군함, 민간함 등을 포함하여 193척의 배가 동원됩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배는 ‘메러디스 빅토리 호(Meredith Victory)’입니다. 당시 이 배에 태울 수 있는 피난민의 숫자는 고작 13명 뿐이었는데요. 아비규환이 된 흥남 부두를 지켜 보던 빅토리 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는 무기를 버리고 사람을 태우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결국 배에 실려있던 25만톤의 군수물자는 버려지고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1만 4천여 명이 탑승하게 됩니다. 피난민들 승선할 때까지 16시간이 소요되었고, 그렇게 피난민들을 태운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12월 23일 흥남에서 출항합니다.


▲ 탈출 중인 피난민들 (출처 : 전쟁기념관)


이틀 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2박 3일 동안의 극한 상황 속에서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경남 거제도에 도착한 것인데요. 그동안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 미군들은 그들의 이름을 김치1, 김치2… 그리고 김치5로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피난민 수송에 큰 역할을 한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기네스북에 ‘단일 선박으로 최다 인원을 구출한 배’로 등재되었습니다.

또한 이 흥남철수작전으로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는 물론, 피난민까지 안전하게 철수했고,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가 철수하였습니다.


▲ 거제 포로수용소의 흥남철수작전 기념비


대규모의 육해공 합동작전이었던 흥남철수작전에서 최대한의 전투력을 보존한 만큼,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단계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수 있었습니다.


▲ 현봉학 박사 동상


▲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에 헌화하고 있는 내빈들


지난 12월 19일(화),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 건립 1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빌딩에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 고(故) 현봉학 박사 동상 건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문재인 대통령 축사를 대독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계획하고 계신가요?

67년 전 12월, 흥남철수작전에서 피난민을 구출하기 위해 힘썼던 모든 분들을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져보셨으면 좋겠습니다. 6.25전쟁 당시, 인간의 존엄과 인권이 내버려지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이라도 지키기 위해 발벗고 나섰던 많은 사람들, 그들을 꼭 기억해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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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준식

    2017.12.22 22:1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십니까?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입니다.

    벌써 올해 성탄절이 다가오는 가운데, 12월은 연말이다 보니 우리 주변에 어려운 이웃 등에게 더욱 관심이 가는 따뜻한 사랑과 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달인데요. 마침 6·25전쟁 중에도 이러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에 저로서는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특히 흥남에서 출발하여 한 명의 사상자 없이, 오히려 5명의 아이(김치)가 태어나 무사히 거제도 땅에 도착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현봉학 박사의 끈질긴 노력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여 현봉학 박사의 인류애에 다시 한 번 감동을 받게 됩니다. 마침 내년에도 6·25전쟁영웅에 선정되신 분들 중 현 박사와 함께 흥남철수작전을 이끌었던 에드워드 포니 미국 해병대 대령과 현봉학 박사의 동생인 현시학 해군 소장(제독)도 선정이 되어 계시네요.

    그리고, 가수 현인 선생님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가사 중 '바람 찬 흥남 부두에' 라는 가사가 나오지만, 이와 비슷한 가사가 나오는 노래인 '라구요(강산에)' 역시 오늘 이 흥남철수작전 관련 게시물을 보면서 생각나게 됩니다.

    그럼 오늘도 좋은 정보를 남겨주신 훈남훈녀 관계자 분들께 깊이 감사를 드리며, 훈남훈녀 관계자 분들께서도 Merry Christmas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7. 12. 22. 충남 아산에 거주하는 역사·문화·나라사랑 분야에 관심이 많은 대학생. 네스카페, 김준식 드림.

  2. 미소양

    2017.12.23 15: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동적이군요
    오늘하루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3. 이유진

    2017.12.25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존경스럽습니당!!!!

 

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초기,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다부동, 포항 일대에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 통일을 이룩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군과 유엔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대거 개입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이른바 ‘인해전술’로 1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계속해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 지역을 점령했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 남진하는 중공군의 모습 (출처: 중국해방군화보사)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 중 일어났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장진호의 한파 속에서 전개된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물자의 주요 이동경로를 차단했고, 북한군 병력은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북진하던 미군 제1해병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독 추운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무려 영하 40도에 달했던 강추위로 물과 식량이 얼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하였습니다. 차량과 탱크의 기름도 얼어붙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설상가상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은 11월 27일, 미 제1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군은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11월 30일 장진호 근처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하갈우리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한 중공군이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출처: 국방부 공식 블로그)

 

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가며 가까스로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함흥 지역에 모두 진입하면서 장진호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1만 5천여 명의 미군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켰던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 부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죠.

또한, 6.25전쟁 3대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는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던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한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장진호 전투중 국군의 모습 (출처: EBS다큐멘터리)


67년 전 극한의 추위 속에서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 이 전투에서 스러져간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숨 바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국군과 유엔군의 명복을 빕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8591&cid=46628&categoryId=46628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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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8일(현지시간)에 문재인 대통령이 부인 김정숙 여사와 함께 취임 후 첫 미국 순방에 나섰는데요. 미국 순방 일정 중 가장 먼저 소화한 일정이 다름 아닌, 미 버지나아주 콴티코 국립 해병대 박물관에 위치한 장진호 전투 기념비(지난 5월 4일 완공)를 찾은 것. 문재인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방문 소식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를 달리며 국민들의 이목을 끌었답니다. 장진호 전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기에 미국 방문 첫 일정으로 이 기념비를 찾은 것일까요?


# 1950년,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


▲ 6.25전쟁 당시의 장진호 모습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국군과 UN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서울 지역을 수복한 연합군은 전쟁 물자의 주요 이동경로를 차단했고, 북한군 병력은 자연스럽게 고립됐죠. 나아가 월등한 전쟁물자와 병력을 바탕으로 적들을 각개 격파하는데 성공한 맥아더 장군은 점진적인 북진을 결정합니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했습니다.


▲ 한국전선에서 협의하고 있는 팽덕회(좌)와 김일성(우)

(출처: 전쟁기념관)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은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제1선 부대였는데요. 북진을 거듭하던 미 제1해병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야만 했습니다. 다행히 북한군의 공격은 없었지만 그 해 겨울엔 유독 추운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무려 영하 40도에 이르는 강추위는 차량과 전차의 연료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 식량 역시 얼어붙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하여 그야말로 생지옥의 현장이 펼쳐집니다.


▲ 진격하는 인민군

(출처: 전쟁기념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은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 결정을 내렸고, 무려 12만 명 규모의 제9병단(7개 사단 병력)을 전쟁에 투입하였습니다. 11월 초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격은 유엔군이 생각한 그 이상의 기세였습니다. 11월 27일, 미 제1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한 중공군은 그 이후로 매일 밤마다 뿔피리를 불어대며 공격을 해왔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모든 전투병사와 비전투 병사들을 동원해 진지를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11월 30일 장진호 근처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이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중공군을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북한의 유담리 포위망 돌파 작전은 일단락되는 듯 했습니다.

 

▲ 중공군의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


한편, 장진호 동쪽에 고립된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 및 저항에 발이 묶여있던 상황이었는데요. 이들은 자신들의 구출작전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후방 하갈우리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후퇴를 중공군이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중공군 제58사단과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가며 가까스로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함으로써 장진호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이어진 이 장진호 전투로 인해 미군은 큰 손실을 입고 말았습니다. 자칫 미제1사단이 전멸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죠. 이 전투에 대해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도 기록한 바 있죠. 또한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됐습니다. 


하지만, 장진호 전투는 6.25전쟁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만 5천여 명의 미군 대비 10배가 넘는 중공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공군 측에도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해야만 했죠. 


▲ 종군기자가 찍은 장진호 전투 실제 사진


미 해병대 3대 전투이자 6.25전쟁 3대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 이는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던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케 한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6.25전쟁 참전 67주년, 장진호 전투를 기리다.


이번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찾은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대해 살펴볼까요? 대한민국과 미국은 지난 5월 4일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장진호 전투 기념비는 2013년부터 현지 미 해병대 참전용사들이 모금을 시작하여 국가보훈처, 민주평통, 애국단체총연합회 등 한국 국민들의 정성을 모아 완공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기념비는 8각 모양으로 각 면에는 고토리, 하갈우리 등 지역별로 이어진 장진호 전투의 기록이 면면에 남아 있습니다. 또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던 함경남도 장진군 고토리 지역을 기념해 ‘고토리의 별’ 장식을 올렸습니다. 이 ‘고토리의 별’ 장식은 미 해병대가 눈보라가 그친 밤에 밝은 별이 뜬 뒤 포위망을 뚫은 것을 기념해 ‘고토리의 별’ 장식을 배지로 달기 시작한데서 유래했습니다.



▲ 장진호 전투 기념비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님은 흥남철수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타고 거제도로 피난을 내려오셨고, 그 거제도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순방지인 미국에서 첫 공식 일정으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참배하며, “엄청난 희생을 치른 장진호 전투의 결과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있었고 제가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장진호 전투가 없었더라면 흥남철수작전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인데요. 


그와 더불어 문 대통령은, 장진호 전투에 이등병으로 참전했고 기념비 설립을 주도한 스티븐 옴스테드 예비역 중장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많은 유엔 참전용사들이 이 땅에서 숨져갔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위해 엄동설한의 추위와 두려움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방문을 계기로, 더욱 많은 이들이 장진호 전투에서 스러져간 영웅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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