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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리아 여사는 슬하에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4남매를 두었습니다.

1905년 남편 안태훈 선생은 지병으로 서거하게 됩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지원 아래 1906년, 안중근과 동생들은 삼흥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안중근이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했을 때도 조마리아 여사는 의연금을 기부하며 적극 동참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 감옥으로 안중근 의사를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조마리아 여사를 추궁하였으나,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했습니다.

갈수록 심해지는 일제의 탄압에 조마리아 여사 가족은 1910년 5월 이후,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마리아 여사는 1922년 상해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상해재류동포정부후원회 위원을 역임하며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 후 조마리아 여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에 재정적 지원을 위해 힘썼습니다.

상해 거주 당시 조마리아 여사는 평소 모범을 보이는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동포들 간 다툼이 일어나면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했습니다.

'여중군자','여걸','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되는 조마리아 여사.
그녀는 대답하고 의기로운 성품으로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 역할을 수행했으며,한국여성 독립운동가의 모법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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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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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혜진

    2017.08.23 21: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군요 몰랐네요 ㅠㅠ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국가보훈처가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17년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조마리아 여사가 하얼빈 의거로 뤼순 옥중에 있는 큰아들 안중근 의사에게, 두 아들 정근과 공근을 통해 전하도록 당부한 말입니다.

저는 지난 2017년 7월 18일 무더운 여름날 오후,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낳은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 공훈선양 학술강연회가 열린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이름은 조성녀이고, 마리아는 세례명입니다)는 1862년 4월 8일(음력)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나 같은 지역의 안태훈 선생과 혼인하였는데요. 슬하에 아들 3명과 딸 1명을 두었으며, 남편의 권유에 따라 1897년 뮈텔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 조마리아 여사와 그의 자녀들(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조마리아 여사의 자녀는 모두 독립운동가로 성장했습니다.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한 안정근 선생과,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관리하여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항일 의거를 성사시킨 안공근 선생. 그리고 독립군의 군복을 손수 만들어 독립운동을 지원한 안성녀 선생 등 3남 1녀를 모두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헌신하도록 키우시고, 자신도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07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조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하였는데요. 안중근 의사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여사 또한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습니다. 또한, 평안남도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를 통해 은장도, 은가락지 등 당시 20원상당의 은제품을 의연금으로 냈으며 주변 사람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습니다.


▲ 조마리아 여사의 기부기사(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조마리아 여사는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순국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두 아들 정근과 공근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는데요. 이후 1914년 3월에는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생활했습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수만 리를 돌아다니며 일제 침략에 대한 동포들의 각성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애국 활동을 벌였으며, 이때 니콜리스크에서 1922년 4월에 회갑을 맞이하여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잔치를 치렀다고 합니다. 


▲ 조마리아 여사 수연기념(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두 아들 정근과 공근이 있는 상해로 이주하여 지냈는데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교포들의 어려움을 돌보고 동포들 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으며,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각별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조마리아 여사의 둘째 아들 안정근 지사의 딸인 친손녀 안미생이 백범 김구 선생의 큰아들 김인과 결혼했습니다.


▲ 백범 김구선생과 며느리 안미생(조마리아 여사의 손녀)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조마리아 여사는 가정의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던 대한민국임시정부후원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요, 1926년 7월 19일 조직된 ‘상해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27년 7월에 열린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는 최승봉, 김순애(김규식선생 부인)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후원활동을 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로서 흐트러짐 없이 의연했는데요. 일제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이후 순사와 헌병을 보내 조마리아 여사를 조사하자, “아들은 진실한 애국자”라며 평소 행적을 태연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조마리아의 모습에 일본 관헌들도 감탄했으며,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1910년 1월 30일 ‘시모시자(是母是子, 그 어머니에 그 아들)’라고 보도했습니다.

또한, 일제가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조마리아 여사는 “이토가 다수 한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라며, 일제의 재판을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 시모시자라고 보도한 대한매일신보(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조마리아 여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를 직접 면회하지 않고, 면회하러 가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들을 통해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는데요. 

안중근 의사는 이 같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항소하지 않았으며,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에게 손수 지은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 의사가 이 옷을 입고 순국하도록 했습니다.


아들 셋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빛낸 독립운동가로 키우고, 자신도 담대한 기상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위암으로 66세에 별세하셨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조마리아 여사, 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식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조마리아 여사의 공훈을 기리는 기념식과 학술강연회가 지난 7월 18일 오후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공훈선양 학술강연회에는 행사 주관단체인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 김황식 이사장, 박유철 광복회장을 비롯해 내빈, 시민, 학생 등 250여명이 참석하였는데요.

1부 기념식과 2부 학술강연으로 나누어 진행된 1부 기념식은 국민의례, 김황식 이사장의 기념사, 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패 및 축하패 전달, 박유철 광복회장의 격려사, 이경근 서울지방보훈청장의 축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고, 듀오아임의 ‘아들아 아들아’축하공연이 있었습니다.


▲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기념사 모습


▲ 유족대표가 서울지방보훈청장에게 기념패를 받는 모습


▲ 광복회장 축사 모습


▲ 듀오아임의 축하공연 모습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 학술강연


조마리아 여사에 대한 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기념식이 끝나고, 이배용 박사께서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과 여성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강연하셨는데요.

이배용 박사는 강연에서 안중근 의사의 삼흥학교 설립, 돈의학교 인수 등의 열정적인 교육사업은 조마리아 여사의 든든한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907년 고종폐위와 군대해산으로 국외로 망명을 떠나던 안중근 의사에게 했던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 등의 가르침은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독립운동사의 큰 산맥에 안중근 의사가 있다면, 또 하나의 산맥에는 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투혼 정신이 함께 있었다”면서,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성장배경에는 늘 어머니가 지켜준 큰 힘이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강연을 들으면서 영웅은 바른 가르침으로 이루어진 성장배경에서 만들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전 이배용 원장의 강연 및 강연회 참석자 모습


올해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조마리아 여사 공훈선양 기념식과 학술강연회를 통해, 업적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마리아 여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강연회를 마치고 기념관을 나오며 자녀 모두를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인물로 키우시고, 본인 스스로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의 생애와 업적을 마음 속 깊이 새겨본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참고자료]

1. 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

2.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7월의 독립운동가 선정, 언론보도자료」(http://www.mpva.go.kr/open/open210_list.asp)

3.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

4. 이배용「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과 여성사적 의미」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조마리아 여사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강의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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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황해도 해주군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조마리아 여사는, 같은 지역의 안태훈 선생(1862~1905)과 혼인했는데요. 1897년 여사는 남편의 권유에 따라 영세를 받았고, 이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 조마리아 여사


조마리아 여사는 슬하에 안중근(1879~1910), 안성녀(1881~1954), 안정근(1884~1949), 안공근(1889~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성장하여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습니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자식들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요. 1905년 지병으로 서거한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유산을 나눠주며 자식들이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도록 든든한 뒷받침을 해주었습니다. 덕분에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 형제들의 민족교육운동 역시 조마리아 여사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 안정근 선생


1907년 1월, 서상돈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던 때 조마리아 여사도 적극 동참합니다. 안중근이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였을 때, 여사 또한 국채보상 의연금을 기부하며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보탰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합니다. 이 의거는 국내외 각지에서 반일운동을 벌이던 한인들에게 큰 찬양을 받았고, 나아가 서구 열강이 주목한 국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안중근의 가족은 의거 직후부터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았습니다.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견하여 조마리아 여사를 추궁하였으나, 여사는 태연하게 자신의 아들 안중근은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습니다.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조마리아 여사는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며 일제를 강하게 질타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조마리아 여사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습니다.


▲ 안중근 의사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어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에게 손수 지은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죠.


▲ 뤼순감옥특별면회실에서 안중근과 홍석구 신부, 안정근, 안공근 두 아우와 면회 장면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습니다. 망명 이후 여사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는 찬양과 주목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

(뒷쪽 왼쪽 4번째가 안공근 선생)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는데요. 1922년 조마리아 여사는 상해로 이주하여 2남 안정근과 함께 지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여사는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으로서 임시정부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그녀는 백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위암으로 인해 66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는데요.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생전 ‘여중군자’, ‘여걸’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담대하고 의기로운 성품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조마리아 여사. 이러한 여사의 인품을 토대로 한 가르침은, 힘든 상황에서도 자식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었습니다. 그간 자식들에 가려져 조마리아 여사의 독립운동은 잘 드러나 있지 않았는데요. 앞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던 7월의 독립운동가, 조마리아 여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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