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402,118
  • Today | 170
  • Yesterday | 2,923

 

1950년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 초기, 국군은 유엔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다부동, 포항 일대에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하고, 38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의 주도권을 쟁취한 국군과 유엔군은 곧 통일을 이룩하고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부풀었죠.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국군과 유엔군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중공군이 전쟁에 대거 개입함에 따라 전쟁의 양상이 다시 한 번 바뀌게 된 것이었습니다.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여, 이른바 ‘인해전술’로 1차 공세를 개시한 중공군은 계속해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국군은 계속 진격하여 압록강변 초산 지역을 점령했고, 서부 지역의 미 제24사단은 신의주 남방 정거동까지 진출하였습니다.


▲ 남진하는 중공군의 모습 (출처: 중국해방군화보사)


하지만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부딪쳐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중공군의 2차 공세 중 일어났던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 장진호의 한파 속에서 전개된 전투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쟁 물자의 주요 이동경로를 차단했고, 북한군 병력은 고립되었습니다. 이후 계속해서 북진하던 미군 제1해병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해야 했습니다.
당시 유독 추운 한파가 몰아닥쳤습니다. 무려 영하 40도에 달했던 강추위로 물과 식량이 얼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하였습니다. 차량과 탱크의 기름도 얼어붙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유엔군과 국군 (출처: 국가기록원)


설상가상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이어졌습니다. 중공군은 11월 27일, 미 제1해병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미군은 모든 병사들을 동원해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은 11월 30일 장진호 근처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 계획을 재검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한편, 장진호 동쪽의 미 제7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에 발이 묶여 고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하갈우리 지역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한 중공군이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동이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출처: 국방부 공식 블로그)

 

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 공격에 많은 손실을 입어가며 가까스로 병력을 후퇴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이 12월 11일 함흥 지역에 모두 진입하면서 장진호 전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1만 5천여 명의 미군의 10배가 넘는 중공군 병력의 진격을 지연시켰던 장진호 전투는 중공군 측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습니다. 이 전투 이후 중공군 부대는 부대를 다시 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죠.

또한, 6.25전쟁 3대 전투로도 기록되어 있는 장진호 전투는 훗날 흥남 부두의 피난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켰던 ‘크리스마스의 기적’, 흥남철수작전을 가능하게 한 시간적 여유를 벌어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 장진호 전투중 국군의 모습 (출처: EBS다큐멘터리)


67년 전 극한의 추위 속에서 벌어졌던 장진호 전투. 이 전투에서 스러져간 참전용사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목숨 바쳐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킨 국군과 유엔군의 명복을 빕니다.


* 참고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8591&cid=46628&categoryId=46628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은 치열한 혈투를 거듭했습니다. 정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 중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는데요. 10월의 전쟁영웅은 바로 이 저항과 역습의 최전방에서 백마고지 탈환을 이끌어낸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입니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하루 평균 5만발의 포탄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적진에 투하되는 곳으로, 작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 당시 백마고지는 포격으로 인해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될 정도로 그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국군 (출처: 군포시민신문)


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당시)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하였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는 국군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최전방으로 나아가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습니다.




▲ 적진을 향해 쏘는 박격포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이 상황에서 김경진 중령은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으로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헤쳐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있던 제6중대를 제5중대의 좌측으로 진출시켰습니다. 이후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자신도 직접 최전방으로 나아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 소비된 수 만개의 탄피 (출처: 경북일보)


정상을 20여 미터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던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의 박격포가 근처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포탄의 파편이 중령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경진 소령은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격전지로 진격하는 국군의 모습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김경진 소령이 전사한 이후 대대원들은 그가 생전 보여준 용맹한 솔선수범에 전투의지를 불태웠고, 과감히 돌격하여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경진 중령의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무려 1,129일간 벌어졌던 6.25전쟁. 그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6.25전쟁의 마지막, 금성지구전투에 대해 조명해 보려 합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1951년 7월 10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회담은 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와 포로 송환 등,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게 됩니다.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8선상에서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고지전. 오늘은 그 중에서도 6.25전쟁 역사에서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 금성지구 전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주변 모습 


# 휴전회담과 고지전투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회담 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 속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은 휴전회담 초기부터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했었는데요. 같은 해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 포로 2만 6,000여 명을 석방시켰습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하게 됩니다.


▲ 금성지구 전투 당시 중공군의 모습


# 중공군의 7.13공세, 금성지구 전투

금성지구 전투는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이 정전이 임박해졌을 때 군사적으로 유리한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금성 돌출부’를 탈취하기 위해 감행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일명 ‘7.13공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당시 중공군 4개군 산하 12개 사단 병력 23만여 명이 동원된,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에 대한 최후 공세였습니다. 


▲ 중공군 대공세 당시 포병대 모습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공격은 금성 돌출부의 좌우 견부인 미 제9군단의 수도사단 지역과 국군 제2군단의 국군 제3사단 지역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국군은 이에 맞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적으로도 열세였을뿐더러, 금성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국군은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요. 이 전투에서 국군 5개 사단은 금성 돌출부의 양 견부가 돌파되었으며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 등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 중공군의 7.13공세 준비 모습


그러나 그 후 16일부터 국군 제2군단이 반격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요. 국군의 끈질긴 저지와 그로 인한 병력 손실, 거기에 장마로 인한 보급의 한계로 중공군은 더 이상의 진격 대신 재정비를 택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가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발이 묶인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국군은 미 제8군의 공격 목표인 아이슬랜드 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북안의 원래 진지를 수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가지도 무르지도 못하는 대치가 지속되는 사이, 유엔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 공방전만 이어가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 중공군 2차 대공세 당시 모습


이 전투의 결과로 국군은 1만 4천여 명의 병력을 잃었으나 중공군은 최소한 2만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6.25전쟁 역사상 초유의 전과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금성지구를 탈환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금성지구 일부(현재 강원 화천군 상서면 일원)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강원 화천군 상서면 소재)


정전 협정 체결을 앞두고 많은 국군 장병들과 유엔군은 기나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과,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휴전회담이 지연되면서 군사전략상 중요한 고지라는 이유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수많은 젊은 목숨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 당시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은 2017년 현재, GDP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는 7월 27일(목)은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금성지구 전투를 비롯한 전장에서 산화한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의 넋을 기리며 포스팅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참고 자료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newwm/sub06/sub06_01_view.jsp?idx=229


※ 관련 내용 알아보기

정전협정 체결 과정 알아보기: http://mpva.tistory.com/4622

7.13공세를 막아낸 국군 제6사단 김교수 대위 카드뉴스: http://mpva.tistory.com/4629

고지전투 더 알아보기: http://mpva.tistory.com/4535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 호..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웹툰으로 만나는 독립운동가 _ 강우규 의사
12월의 독립운동가 - 김치보 선생
12월의 전쟁영웅 - 감봉룡 경찰 경감
[제10기 훈남훈녀 기자단 팀미션 - 2조] 11월 11일, 유엔참전용사를 기억합시다
국가보훈처 동영상
문재인 대통령과 식사하고 올림픽도 직접 보고! 아이디어 올림픽에 지금 도전하세요!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