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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 국군과 유엔군, 북한군과 중공군은 치열한 혈투를 거듭했습니다. 정전 협정 체결까지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그 중 백마고지 전투는 10일 동안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세계 전쟁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혈전이었는데요. 10월의 전쟁영웅은 바로 이 저항과 역습의 최전방에서 백마고지 탈환을 이끌어낸 10월의 전쟁영웅, 김경진 육군 중령입니다.


당시 백마고지는 철원평야 서북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하루 평균 5만발의 포탄이 허공을 가로질러 서로의 적진에 투하되는 곳으로, 작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이 당시 백마고지는 포격으로 인해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 그 모양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될 정도로 그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 북한군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국군 (출처: 군포시민신문)


1952년 10월 11일 국군 제9사단 제29연대 제2대대장인 김경진 소령(당시)은 사단장으로부터 불과 1시간 전 제1대대가 물러났던 정상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역습을 감행하였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서 적진을 향해 달리는 국군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그는 고지 정상의 중공군이 진지보강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최전방으로 나아가 부하들을 독려하며 진두지휘했습니다.




▲ 적진을 향해 쏘는 박격포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이 상황에서 김경진 중령은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으로 병사들과 함께 생사의 고비를 헤쳐 나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백마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있던 제6중대를 제5중대의 좌측으로 진출시켰습니다. 이후 빗발치는 총탄과 포탄 파편을 뚫고 포복으로 전진하여 자신도 직접 최전방으로 나아갔습니다. 


▲ 백마고지 전투에 소비된 수 만개의 탄피 (출처: 경북일보)


정상을 20여 미터 앞둔 지점까지 진출했던 김경진 소령은 최후의 돌격사격을 감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적의 박격포가 근처에 떨어졌고 그 여파로 포탄의 파편이 중령을 향해 날아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김경진 소령은 적의 박격포탄에 의해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격전지로 진격하는 국군의 모습 (출처: 김병장네 실시간 이슈)


김경진 소령이 전사한 이후 대대원들은 그가 생전 보여준 용맹한 솔선수범에 전투의지를 불태웠고, 과감히 돌격하여 백마고지를 탈환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 백마고지 전적 기념관


정부는 김경진 소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우리는 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김경진 중령의 ‘사병과 더불어’라는 지휘철학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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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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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129일간 벌어졌던 6.25전쟁. 그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는 어떤 것이었을지 생각해본 적 있으신가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6.25전쟁의 마지막, 금성지구전투에 대해 조명해 보려 합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이후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1951년 7월 10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회담은 군사 분계선 설정 문제와 포로 송환 등,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하게 됩니다. 


양측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8선상에서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였던 고지전. 오늘은 그 중에서도 6.25전쟁 역사에서 마지막 전투로 기록된 금성지구 전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장 주변 모습 


# 휴전회담과 고지전투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대체로 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에는 전선이 소강 상태를 유지했으며, 회담이 결렬 또는 지연될 경우에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회담 천막과 전장 사이를 오가는 지루한 상황이 2년여 동안 지속되었는데요. 


양측은 38선상에서 피의 능선 고지 전투, 단장의 능선 고지 전투, 펀치볼 전투, 고양대 전투, 백마고지 전투, 저격 능선 전투, 금성지구 전투 등 수많은 고지 쟁탈전을 벌였습니다. 군사 전략상 중요한 고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주인이 뒤바뀌는 혈전 속에서, 엄청난 비용과 인명 손실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1953년 3월, 휴전에 반대하던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회담은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은 휴전회담 초기부터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휴전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했었는데요. 같은 해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 포로 2만 6,000여 명을 석방시켰습니다. 

6.25전쟁 당시 중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대규모의 공세를 준비하게 됩니다.


▲ 금성지구 전투 당시 중공군의 모습


# 중공군의 7.13공세, 금성지구 전투

금성지구 전투는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이 정전이 임박해졌을 때 군사적으로 유리한 중부전선의 요충지인 ‘금성 돌출부’를 탈취하기 위해 감행한 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일명 ‘7.13공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당시 중공군 4개군 산하 12개 사단 병력 23만여 명이 동원된, 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에 대한 최후 공세였습니다. 


▲ 중공군 대공세 당시 포병대 모습


1953년 7월 13일 중공군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첫 공격은 금성 돌출부의 좌우 견부인 미 제9군단의 수도사단 지역과 국군 제2군단의 국군 제3사단 지역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국군은 이에 맞서 치열한 사투를 벌이며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수적으로도 열세였을뿐더러, 금성지역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국군은 절반 이상이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병들이었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는데요. 이 전투에서 국군 5개 사단은 금성 돌출부의 양 견부가 돌파되었으며 뒤이어 후방의 지휘소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는 등 혼란이 야기됨으로써 국군은 금성천 남쪽의 백암산과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하게 되었습니다.


▲ 중공군의 7.13공세 준비 모습


그러나 그 후 16일부터 국군 제2군단이 반격 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요. 국군의 끈질긴 저지와 그로 인한 병력 손실, 거기에 장마로 인한 보급의 한계로 중공군은 더 이상의 진격 대신 재정비를 택했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7월 16일부터 김종묵 소대장이 이끄는 특공대가 큰 활약을 하게 됩니다. 더불어 국군 제2군단(당시 5사단, 8사단, 11사단)은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발이 묶인 중공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국군은 미 제8군의 공격 목표인 아이슬랜드 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금성 돌출부인 금성천북안의 원래 진지를 수복하지 못한 채, 이 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아가지도 무르지도 못하는 대치가 지속되는 사이, 유엔군의 제지로 더 이상의 진격은 하지 못한 채 전선 일대에서 공방전만 이어가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습니다.


▲ 중공군 2차 대공세 당시 모습


이 전투의 결과로 국군은 1만 4천여 명의 병력을 잃었으나 중공군은 최소한 2만 8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6.25전쟁 역사상 초유의 전과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금성지구를 탈환하고자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금성지구 일부(현재 강원 화천군 상서면 일원)를 탈환할 수 있었습니다.


▲ 금성지구 전투 전적비(강원 화천군 상서면 소재)


정전 협정 체결을 앞두고 많은 국군 장병들과 유엔군은 기나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과,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휴전회담이 지연되면서 군사전략상 중요한 고지라는 이유로, 빼앗고 빼앗기는 치열한 공방 속에서 수많은 젊은 목숨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 당시 폐허가 되었던 대한민국은 2017년 현재, GDP 세계 12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국군과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오는 7월 27일(목)은 ‘6.25전쟁 정전협정 및 유엔군 참전의 날’입니다.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금성지구 전투를 비롯한 전장에서 산화한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의 넋을 기리며 포스팅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참고 자료

전쟁기념관 https://www.warmemo.or.kr/newwm/sub06/sub06_01_view.jsp?idx=229


※ 관련 내용 알아보기

정전협정 체결 과정 알아보기: http://mpva.tistory.com/4622

7.13공세를 막아낸 국군 제6사단 김교수 대위 카드뉴스: http://mpva.tistory.com/4629

고지전투 더 알아보기: http://mpva.tistory.com/4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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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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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숨져갔고, 죄 없는 민간인들도 전란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죠. 전쟁고아 양산, 산업 시설 파괴 등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비극적인 6.25전쟁은 왜 일어나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의 배경과 북한의 남침 준비


▲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폭발 장면


때는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미국의 군사 점령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주체와 극동 지역 군사 작전의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되었는데요. 이 문서에 언급된 38도선은 9월 초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책임 구역을 할당하기 위한 편의적인 조치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38도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1.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 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 해, 공군과 보조 부대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항복하라

2.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작은 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류큐 열도와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육, 해, 공군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


당시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8월 말에 북한 전역을 장악한 소련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이상, 통일의 꿈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르자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내각 구성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에 김일성을 내세운 불법적인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 남북 통일 정부를 이룩하기 위해 방북한 김구 선생


북한 지도부는 민중 봉기 등을 통해서는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 달성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남침을 계획합니다. 북의 남침 계획은 1개월을 목표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하게 됩니다.


▲ 스탈린의 집무 모습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을 감행함에 따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동안, 갑작스러운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남한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적에게 서울을 내어주었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6월 25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어서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52개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사진제공: 유엔군 초전기념관)


1950년 7월 4일,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고 있던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의 많은 청년학도들과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요. 이들 중에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참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국군과 유엔군은 끝까지 낙동강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하여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10월 1일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또 중공과 러시아가 있는 두만강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정전 협정



유엔군 사령군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 부근의 모든 부대에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군하도록 독려했는데요.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게 됩니다. 이제 전쟁은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대결이 되었는데요.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밀려 내려가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해인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는데요.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38도선 부근에서는 계속해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와 저격 능선 전투 등이 이 당시 일어났던 고지 쟁탈전에 속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여 3년 이상 계속되던 전쟁이 멈추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 6.25전쟁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1,129일이나 계속된 전쟁이 멈춘 휴전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 6.25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얻은 결과입니다. 전쟁이라면 먼 얘기 같지만, 그 당시를 겪었던 많은 분들의 아픈 시간은 여전히 67년 전에 멈춰 있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10여일 남은 지금,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는 6월 25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6.25전쟁 67주년 행사'강한 안보로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거행됩니다. 


또한 6월 22일(목)부터 27일(화)까지 5박 6일동안, 미국 참전용사 및 교포 참전용사 등 83명이 재방한하여 여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6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을 잊지 않고,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참고 문헌

국가보훈처 6.25전쟁 60년 계기 교육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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