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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같은 민족끼리 총칼을 겨누었던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의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국군과 유엔군이 숨져갔고, 죄 없는 민간인들도 전란 속에서 고통 받아야 했죠. 전쟁고아 양산, 산업 시설 파괴 등 우리나라에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비극적인 6.25전쟁은 왜 일어나게 된 걸까요? 지금부터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그 전개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남북 분단의 배경과 북한의 남침 준비


▲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폭발 장면


때는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갑작스럽게 연합국 측의 무조건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미국의 군사 점령이라는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주체와 극동 지역 군사 작전의 한계선을 신속히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군이 어디에서 누구에게 항복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일반명령 제1호’가 작성되었는데요. 이 문서에 언급된 38도선은 9월 초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여 무장을 해제하고 책임 구역을 할당하기 위한 편의적인 조치였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38도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1. 만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 사할린 및 쿠릴 열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모든 육, 해, 공군과 보조 부대는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에 항복하라

2. 일본국과 일본국 본토에 인접한 모든 작은 섬,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 류큐 열도와 필리핀 제도에 있는 일본국의 선임 지휘관과 육, 해, 공군 및 보조 부대는 미국 태평양 육군 총사령관에게 항복하라.


당시 이러한 조치는 전후처리를 위한 순수한 군사적 조치였으며, 한반도를 정치적으로 분단하기 위한 의도는 내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8월 말에 북한 전역을 장악한 소련은 이미 38도선을 정치적인 구획선으로 인식하고 정치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 것이죠.


우리 민족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을 분할 점령한 이상, 통일의 꿈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갈 수 있는 지역에서만 선거를 치르자는 유엔 총회의 결의에 따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아래,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내각 구성에 이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소련 군정당국은 북한에 김일성을 내세운 불법적인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 남북 통일 정부를 이룩하기 위해 방북한 김구 선생


북한 지도부는 민중 봉기 등을 통해서는 전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무력 달성쪽으로 전략을 바꾸어 남침을 계획합니다. 북의 남침 계획은 1개월을 목표로 3단계로 구성되었고, 스탈린의 동의를 받은 후 남침 개시 일자를 1950년 6월 25일로 정하게 됩니다.


▲ 스탈린의 집무 모습


#6.25전쟁의 발발과 전개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불법 남침을 감행함에 따라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사전 준비를 마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동안, 갑작스러운 전쟁을 예상하지 못했던 남한은 병력과 장비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각 지구에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적에게 서울을 내어주었고, 한강 남쪽에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6월 25일 유엔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고, 미국이 제출한 ‘북한군의 침략 중지 및 38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어서 유엔 안보리는 “그들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지원을 제공하자”는 내용의 ‘6.26 결의안’을 통과시켰는데요. 이 결의에 따라 미국과 자유진영 32개국이 유엔의 결의를 지지했으며, 7월 중순에는 52개국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을 돕기 위해 16개국이 전투부대의 파병을, 5개국이 의료 또는 시설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유엔군의 참전


▲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사진제공: 유엔군 초전기념관)


1950년 7월 4일, 미군 제24사단 선두 부대인 스미스 특수 임무 부대가 미군 최초로 한반도에 도착하여 평택-제천-울진을 잇는 선에서 철수하고 있던 국군과 함께 북한군을 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유엔군의 참전 지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로 8월 1일에는 낙동강선까지 후퇴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국의 많은 청년학도들과 재일학도의용군이 참전함으로써 국군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요. 이들 중에는 만 18세가 되지 않은 어린 소년과 소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애국심으로 참전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한 국군과 유엔군은 끝까지 낙동강을 지키기로 결심했고, 낙동강을 사이에 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선 방어에 성공하여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반격 작전으로 전환하여 9월 28일, 잃어버린 수도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이후 10월 1일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였는데, 이날을 기념하여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10월 20일 평양을 점령하고 11월에는 압록강까지, 또 중공과 러시아가 있는 두만강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중공군의 개입과 정전 협정



유엔군 사령군 맥아더 장군은 국경선 부근의 모든 부대에 압록강, 두만강으로 진군하도록 독려했는데요. 그러나 중공군이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을 결정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한 번 크게 바뀌게 됩니다. 이제 전쟁은 중공군과 북한군,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대결이 되었는데요.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에 의해 밀려 내려가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다음 해인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내주고 후퇴합니다. 



유엔군과 북·중 연합군은 1951년 7월 10일부터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에 들어갔습니다. 한반도 문제를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까닭이었는데요. 그러나 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했고 38도선 부근에서는 계속해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펼쳐졌습니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와 저격 능선 전투 등이 이 당시 일어났던 고지 쟁탈전에 속합니다. 

그러던 중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중공군, 그리고 북한군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하여 3년 이상 계속되던 전쟁이 멈추게 됩니다. 


#잊지 말아야 할 아픈 역사, 6.25전쟁


전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1,129일이나 계속된 전쟁이 멈춘 휴전 상태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2017년 올해, 6.25전쟁이 발발한 지 67주년이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는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얻은 결과입니다. 전쟁이라면 먼 얘기 같지만, 그 당시를 겪었던 많은 분들의 아픈 시간은 여전히 67년 전에 멈춰 있습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이 10여일 남은 지금, 전장에서 용감히 싸운 국군과 유엔군 참전용사 분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는 6월 25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의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6.25전쟁 67주년 행사'강한 안보로 평화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주제로 거행됩니다. 


또한 6월 22일(목)부터 27일(화)까지 5박 6일동안, 미국 참전용사 및 교포 참전용사 등 83명이 재방한하여 여러 행사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6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분들을 잊지 않고, 그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이 후손인 우리가 해야 할 몫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참고 문헌

국가보훈처 6.25전쟁 60년 계기 교육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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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1947년 6월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부산에 주둔하던 제5연대에 배속된 김만술 대위는 1948년 ‘여순 10.19사건’ 진압작전과 태백산맥 등지에서 준동하던 공비토벌작전에 기관총 사수로 참여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한 후 평양 탈환작전을 비롯한 주요 전투에 참전하여 탁월한 지휘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1953년 7월 15일 특무상사에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되어 제1사단 제1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부임 당일 소대원 35명과 함께 베티고지를 지키고 있던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야음을 이용해 인해전술로 공격해오던 중공군 제1군 예하 제1사단의 2개 대대 규모의 적을 맞아 수차례의 공방전을 벌이면서 13시간 동안 치열한 혈전을 전개하여 적350여명을 사살하는 혁혁한 전공을 거두었습니다. 김만술 대위는 1954년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십자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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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 5월 중순, 백재덕 일등중사의 부대는 중부전선의 금성·김화지역 주저항선에서 치열한 고지쟁탈전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재덕 일등중사의 부대가 지키던 ‘샛별고지’는 강원도 금성 서남쪽 약 5.8Km에 위치한 완만한 경사(표고 470m)의 이름없는 산입니다. 주위의 넓은 계곡과 함께 개활지가 넓게 형성돼 있어 적이 수월하게 기동할 수 있고 피아간 포격의 목표가 되어 접근이 곤란한 전술적 요충지였습니다.


백재덕 일등중사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10중대 3소대 3분대장으로서, 이틀 뒤인 17일부로 사단예비인 제1연대와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교대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이 중부전선의 요충지를 사수해야만 했습니다. 10중대는 1952년 10월 지형능선전투에서 적 2개 대대의 공격을 백병전으로 막아낼 정도로 훈련이 잘 되어 있었고 정찰 및 수색활동에도 경험이 많았습니다.


(* 백병전 : 적과 근접해 있어 사격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육박하여 칼·창·총검 등으로 싸우는 전투.

‘육박전’이라고도 함.)



한편, 아군의 방어 정면에는 중공군의 제67군 199사단 예하 제569연대의 2개 대대 병력이 아군진지에 대한 수색공격을 감행하며 아군의 화력, 병력배치 상황을 파악하며 지형정찰 및 포로 획득을 도모하며 샛별고지 점령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 백재덕 이등상사 초상


새벽 1시, 적은 약 5천여발의 포탄을 샛별고지에 퍼부어 아군진지를 교란시킨 후 아군의 전면과 전초진지 전체로 대규모 인해전술을 펼치며 접근해 왔습니다. 아군은 적을 향해 60mm 박격포와 4.2인치 박격포, 105mm 야포를 이용해 필사적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은 집요했습니다. 제10중대 진지 일대에서 수류탄을 주고받는 사투가 벌여졌고 수적으로 우세한 적에게 진지 침입을 허락하고 맙니다. 이에 아군은 대대화력의 병력과 포격을 요청하여 반격에 나서는데요. 마침내 뺏긴 진지를 수복하였고, 도주하는 적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합니다.



▲ 중공군의 야간 로켓포 공격(출처: 전쟁기념관)


5월 15일 밤, 백재덕 일등중사가 지휘하는 3분대는 매복조로 차출됩니다. 백재덕 일등중사는 중대 진지 앞에서 진목동 일대를 살피고 있던 중 수상한 적의 움직임을 눈치 채고 긴급히 조명탄을 발사합니다. 그가 본 건 진지를 향해 은밀히 접근하고 있는 중공군 3개 중대. 백재덕 일등중사는 “여기서 적을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태로워진다. 전 분대원은 나와 같이 이곳에서 뼈를 묻자”며 분대원들을 독려합니다. 


백재덕 일등중사는 침착하게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수류탄을 투척하고, 중공군 제1파 15~16명이 진내로 돌입하자 과감한 백병전으로 적을 격퇴시켰습니다. 



▲ 중공군의 인해전술(출처: 전쟁기념관)



이어 중공군 제2파가 다시금 공격해오자 적을 가까운 거리까지 유인하여 사살하였고, 중공군 제3파가 다시 진내로 진입하자 분대원 6명과 함께 적 10여명을 치열한 백병전 끝에 총검으로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로 분대원 6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백재덕 일등중사는 몸을 사리지 않고 10여명의 적을 사살한 용맹한 군인정신과 진지를 고수한 전공을 인정받아 1954년 이등상사로 1계급 특진하였고, 태극무공훈장 및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샛별고지전투의 승리는 우리군이 중부전선에서 전술적으로 중요한 고지를 무사히 확보해 전선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샛별전투의 주인공인 백재덕 이등상사의 용맹함과 리더십, 살신성인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샛별고지 전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6·25전쟁의 한 조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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