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4,838,952
  • Today | 696
  • Yesterday | 3,452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과 순국


2017년 3월 26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따뜻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걷다보니 어느새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추모식은 아침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 의사 순국 107주기임을 알리는 기념관 외벽의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현수막에 적혀져 있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은 당신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불타는 애국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여순 관동법원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던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으로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 박환 지음,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안중근 의사기념관, 2013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께서는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편지를 받고 자신의 죽음 이후 남겨질 어머니를 걱정하던 안중근 의사께서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기념관 강당 앞의 추모식 현수막(좌)과 전시실 안 의사 유언장면(우)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7주기 추모식 행사


추모식은 10시부터 시작하였지만 추모식을 시작하기 전, “안중근 의사 알리기 UCC공모전”에서 수상한 UCC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의 내용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주장한 부분과 자식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안중근 의사 어머니의 편지글이 나오는 장면이 인상 깊었으며, 가슴 한 켠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오전 10시, 드디어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기 위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이 안중근의사기념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추모식에는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과 안 의사의 유족인 외손녀 황은주 여사, 증손자 안도용(미국명, 토니안), 광복회 박유철 회장을 비롯한 내빈과 학생, 시민 등 약 50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당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습니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및 최후의 유언 낭독, 행사주관 단체인 안중근 의사숭모회 이사장 및 내빈 추모사, 추모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안내 리플렛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꽉 메운 참석자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은 추모식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전혀 잃지 않으셨다”고 말하며, “국민 모두는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도 추모사에서, “애국혼의 표상이시며 평화론자이셨던 안중근 의사님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하였고, 광복회 박유철 회장도 “안중근 의사께서 주장하셨던 동양평화론을 토대로 한․중․일 3국이 합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의 추모식사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의 추모사


내빈 추모사가 모두 끝나고 추모공연으로 성악가 2명이 ‘별이 되어’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으며, 안중근 의사의 숭모사업에 헌신하고 한․일 및 한․중 간 교류․우호증진에 공로가 있는 일본인 2명과 중국인 1명에게 국가보훈처장의 감사패가 수여되었습니다.


▲추모 공연


감사패 수여


다음으로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 및 앞서 상영되었던 UCC공모전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참석 내빈들의 헌화와 참석자 모두가 역사청소년합창단과 같이 ‘안중근 의사 추념가’를 제창하는 것을 끝으로 추모식 행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글짓기 및 UCC 공모전 시상식


역사청소년합창단 추모가 합창


추모식이 끝난 후 의정부에서 온 참석자 A씨는, “안중근 의사가 꿈꿨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또다른 참석자 B씨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지 107년이 되었으나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니 후손된 한 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럽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사관계자 L씨는 “많은 국민들은 안중근 의사가 단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는 교육운동, 계몽활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 옥중에서의 동양평화론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 나라의 독립운동을 넘어 동양평화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지향했던 평화론자였다”고 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통해 안중근 의사께서 염원하셨던 세상을 국민 모두가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안중근 의사는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걱정했던 교육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셨던 사상가이자 평화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 의사의 생애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따뜻해진 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가신 안중근 의사의 추모식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돌아올 봄에는 여러분도 추모식에 참여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겨보며 그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10일 거행된 도산 안창호 선생 제79주기 추모식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믿음과 의리, 즉 ‘신의(信義)’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약속을 했다면 꼭 지켜야 하고,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거짓을 말한다면 상대방에게 믿음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한평생 거짓 없이 신의를 기반으로 성실하고 올곧게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독립운동가가 있습니다. 바로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인데요. 선생은 일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독립운동가요, 조국의 앞날을 위해 늘 솔선수범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한 민족의 지도자입니다.


지난 3월 10일, 도산 안창호 선생을 추모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제79주기 도산 안창호 선생 추모식(이하 추모식)’이 도산공원의 선생의 묘소 앞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이번 추모식에는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과 도산학회 윤경로 회장, 도산기념사업회 김재실 회장, 흥사단 류종열 이사장, 광복회 나중화 부회장 등 많은 내·외빈이 참석했습니다. 


이번 추모식의 사회는 도산기념사업회의 손복 이사가 맡았으며 개식에 앞서 수도방위사령부 군악대의 식전 연주가 있었습니다. 이후 국민의례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차례로 진행됐습니다.


애국가 1절을 먼저 선창한 서울시의회 성중기 의원


다음으로 도산학회 윤경로 회장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을 읊었습니다. 윤 회장은 1931년 2월, 선생이 작성했던 ‘청년에게 부치는 글’을 읊기에 앞서 “동강학회에 소개 된 이 글을 읽기 전에,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도산선생의 좋은 말씀을 발췌해 낭독하고 있다”고 취지를 밝혔습니다. 이후 그는 청년에게 부치는 글 전문을 읊었는데, 이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이 옳은가 그른가, 이 일을 할까 말까 방황하고 주저하면 거기에는 고통이 생깁니다. 또 결국은 낙망합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습니다.


▲도산의 말씀을 읊고 있는 도산학회 윤경로 회장


이후 도산기념사업회 김재실 회장의 추모사가 이어졌습니다. 김 회장은 “오늘은 우리 민족의 스승,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서거한지 79년이 되는 날로써 일제강점기 독립의 한을 품고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영면하신 날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그는 “선생은 애국자의 본보기요, 지도자의 귀감이며 선생의 사상은 아직도 우리의 혈관을 흐르고 있다”고 말하며, 끝으로 “죽더라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 장난이라도 거짓을 말하지 말라고 말했던 선생의 뜻을 본받아, 선생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말했습니다.


▲도산기념사업회 김재실 회장의 모습


다음으로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위대한 발자취는 우리역사에 있어 교훈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고 추념사의 운을 뗐습니다. 또한 그는 “선생은 대성학교와 동명학원을 설립,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으며, 신민회와 대한인국민회, 흥사단을 조직해 세계적으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고 선생의 일대기를 읊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조국의 독립에 헌신한 고귀한 일생은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진심으로 추모 및 경의를 표한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


또한 흥사단 류종열 이사장은 추념사에서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선생의 뜻이 절실한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선생의 뜻을 이어 받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어 경신고등학교 김민수 학생회장은 ‘후배가 도산안창호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에서 “선생의 기념비를 입학식과 졸업식에 마주보면서, 선생의 뜻과 정신을 기리는, 선생을 따르는 자랑스러운 후배들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에 압구정여성합창단의 추모가와, 헌화 및 분향이 진행되었는데요. 국가보훈처에서는 최완근 차장이 직접 선생의 묘전에 헌화함으로써 선생에 대한 예를 갖췄습니다. 이번 추모식은 헌화 및 분향을 끝으로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헌화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묘전 앞에서 묵념하고 있는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


도산은 187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어렸을 적,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며 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후 1894년, 19세가 된 도산은 평양에서 벌어지는 청일전쟁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청일전쟁을 피해 서울로 온 도산은 밀러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며 인생관과 세계관을 넓혔습니다. 이후 독립협회에 참여했는데요. 이때부터 도산의 이름이 한반도에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도산은 평양의 쾌재정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서 ‘무능한 관료들을 비판한 연설’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후 교육자로써 탈바꿈한 도산은, 교육자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 1902년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렵게 영어공부를 시작한 도산은 ‘샌프란시스코 한인친목회’를 결성, 한인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자 주선과 정당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며 지도자의 면모를 나타냈습니다.

1904년,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도산은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며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앞장섰습니다. 다음해인 1905년, 조국 광복을 목적으로 한 ‘공립협회’를 창립, 공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도산은 1907년 신민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경술국치 이후인 1912년에는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했는데요. 흥사단은 현재까지도 남아 도산의 뜻을 기리는 많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안에 있는 회의인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과 고문으로 인해 선생은 1938년 3월 10일, 만 59세의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우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신의를 지켜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선생의 가르침입니다. 도산은 늘 청년들이 민족의 미래라고 강조하며 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하는데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던 그의 말을 가슴 깊이 새겨, 앞으로의 삶에 책임감을 가지고 올바른 마음가짐을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로사리아

    2017.03.16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사 잘 보고 갑니다~^^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 호..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제71회 보훈퀴즈의신
6.25전쟁 67주년 계기, 미 참전용사와 교포 참전용사 동시 방한
6.25전쟁,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접수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