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의거 제108주년 기념식을 가다, 하얼빈역에 울린 평화의 총성
여러분은 지난 10월 26일이 어떤 날이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바로 안중근 의사가 108년 전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인데요. 저는 이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 이를 취재했습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내려 백범광장을 지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일임을 알리는 기념관 외벽의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
# 108년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울린 평화의 총성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와 멈추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의 재정대신 코코프체프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합니다.
그로부터 약 20분 뒤,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의 사절단 앞으로 가서 인사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때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브라우닝(Browning) 권총을 꺼내 그를 향해 총알을 발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3발의 총알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옆구리에 명중하고 복부를 관통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쓰러진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던 일본인들을 향해 총을 3발 더 발사하였고, 이 총알을 맞은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부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禁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중경상을 입고 차례로 쓰러집니다.
당시 31살의 청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대(헌병대장 미치올클로프)에 체포됩니다. 이때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었습니다. 한편, 총알을 맞고 치명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곧 사망합니다.
이것이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내용인데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쾌거는 대한제국 말 우리나라가 망국의 한으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안으로는 많은 국민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밖으로는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와 우리 국민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하얼빈 의거장면 모형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 하얼빈의거 현장 상황도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108주년 기념식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뜻 깊은 하얼빈의거를 기념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고자, 지난 10월 26일(목)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이날 기념식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기념식은 사회자의 내빈소개를 시작으로 국민의례, 안중근 의사의 약전봉독과 의거의 이유 낭독,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기념식사, 내빈 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 기념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국민의례가 끝난 뒤 이영옥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의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이 있었는데요, 약전(略傳)이란 “한 인물의 생애와 업적 등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당에서 사서삼경·통감 등 한학을 익히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16세가 되던 해인 1894년에는 아버지를 도와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양민을 괴롭히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7년에는 아버지 안태훈 진사의 영향을 받아 빌렘신부로부터 도마(토마스, Thomas)라는 세례명을 받고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구문명의 신지식을 익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찾다가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뜻을 펴지 못하고 귀국해, 평안도의 진남포로 이주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구국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907년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정미 7조약의 체결로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어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국외로 나가,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 선생의 후원으로 동의회를 결성하고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의병부대를 지휘해 초기에는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다수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회령군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영산전투 이후 안중근 의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러시아 연해주의 연추(크라스키노)로 가서 의병활동을 같이할 동지들을 규합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하자, 1909년 2월경 러시아 연추의 하리 마을에서 김기룡, 조응순 등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는데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왼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써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동의단지회를 결성했습니다.
▲ 단지동맹 12인(왼쪽)과 혈서로 쓴 대한독립(오른쪽)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당일로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되었다가 다음 날 여순 관동법원으로 이감되어 본격적인 조사와 신문을 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신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국권을 강탈한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상과 하얼빈 의거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밝히셨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그리고 여순 옥중에서 「안응칠 소회」에 이어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한 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한·중·일 3국이 나아가야 할 길 등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에 이어, 한 장교가 행사에 참석한 안중근 잠수함 부대원을 대표하여 ‘의거의 이유’를 낭독하였는데요, ‘의거의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직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직접 밝힌 것입니다.
▲ 하얼빈 의거의 이유를 낭독하는 안중근함 부대원
이어서 김황식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의 기념식사와 내빈들의 기념사가 이어졌는데요.
가장 먼저 연단에 선 김황식 이사장은 기념식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비록 30년 6개월이라는 짧은 삶을 사셨지만 생의 전부를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바치셨다”고 하면서, “안중근 의사께서 108년 전 우리나라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고, 그의 뜻과 사상, 나라사랑 정신을 영광된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한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도 “안중근 의사는 애국혼과 인류공영의 표상으로 남으신 분”이라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들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예우를 받아야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며, ”정부는 따뜻한 보훈 정책을 추진하여 이분들의 영예로운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끝으로, 박유철 광복회장은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의 도발로 엄정한 안보위기에 직면해 있다” 면서, “이러한 위기 극복을 위해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통합을 이루자“라고 했습니다.
▲ 기념사를 하는 김황식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왼쪽)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오른쪽)
김황식 이사장과 내빈들의 기념사가 끝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민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여 안중근 의사의 공훈선양 활동에 기여한, 해군 잠수함사령부 소속의 안중근잠수함에 대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의 부대 표창과 김황식 이사장의 안중근장학금 전달, 서울대 남성중창단 비바앙상블의 기념공연, 대한국인 안중근 노래합창과 안응모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의 명예이사장의 만세삼창으로 기념식 행사는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 서울대학교 비바앙상블 공연모습
▲ 기념식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는 모습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의 만남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까지 그의 곁에서 함께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입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와 이 세분들과의 만남 그리고 108년 전 그날의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크에서 1909년 10월 경,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국내 진공작전 때 의병활동을 같이 했던 우덕순과 함께 10월 21일 블라디보스크를 출발해 다음날 저녁 하얼빈에 도착하여 하얼빈국민회 김성백 회장의 집에서 묵었는데요. 하얼빈으로 오는 도중 러시아 포그라니치나야에서 동지인 유경집 선생의 아들 유동하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23일,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이발을 하고 사진관으로 가서 의거결의 기념사진을 찍었는데요, 기념관 전시실의 그 당시 사진에서 의거를 앞둔 세 사람의 의지가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 3일전에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또한 안중근 의사 일행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하얼빈으로 와서 살고 있던 조도선을 찾아가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거사계획을 의논했는데요. 그날 밤 김성백 회장의 집에서 안중근 의사가 비장한 심정으로 의거결의를 담은 장부가(丈夫歌)를 짓자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를 지어서 화답했다고 합니다.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丈夫歌)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준비에는 연해주의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 선생의 도움도 컸다고 하며, 의거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을 때 러시아인 변호사를 직접 준비하고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준비를 마친 안중근 의사는 교차역으로서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채가구역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역은 자신이 맡기로 하고, 통역과 두 개 역사이의 연락은 유동하가 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채가구역(하얼빈역의 전 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은 실패하게 되는데요. 이는 러시아 경비병이 우덕순과 조도선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 여관의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과 헤어진 후 1909년 10월 25일 오후 1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해서 다음 날인 10월 26일 오전 7시경 하얼빈역내 찻집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후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 의사는 오전 9시 무렵,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되자 온 세계는 떠들썩했고, 동경의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 등 일본의 주요 신문들과 세계 각국의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같이 하얼빈의거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던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지사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하얼빈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문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2017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8주년 기념식은 이렇게 끝이 났는데요.
우리 모두는 안중근 의사가 108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는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뿐만 아니라, 30년 6개월이라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민권운동, 교육・계몽사업, 연해주 의병활동 등 대한제국말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위해 생의 전부를 바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겨보며, 그가 108년 전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훈남훈녀 제10기 기자단 이지민 기자
〔참고자료〕
1.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
2.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http://www.ahnjunggeun.or.kr) 및 전시실 자료
3. 박환 지음,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2013. 안중근의사기념관
4. (사)안중근의사숭모회 펴냄, ‘대한의 영웅 안중근’ 2012. (사)안중근의사숭모회/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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