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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지난 10월 26일이 어떤 날이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바로 안중근 의사가 108년 전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인데요. 저는 이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 이를 취재했습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회현역에서 내려 백범광장을 지나 안중근의사기념관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10월 26일이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일임을 알리는 기념관 외벽의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 안중근의사기념관 외벽에 걸린 대형 현수막


 # 108년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울린 평화의 총성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무렵,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으로 들어와 멈추자 대기하고 있던 러시아의 재정대신 코코프체프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열차 안으로 들어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합니다.

그로부터 약 20분 뒤,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려 코코프체프의 안내를 받으며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의 사절단 앞으로 가서 인사를 받기 시작합니다.

이때 러시아 의장대 뒤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자, 브라우닝(Browning) 권총을 꺼내 그를 향해 총알을 발사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발사한 3발의 총알은 이토 히로부미의 가슴과 옆구리에 명중하고 복부를 관통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그 자리에서 쓰러집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쓰러진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토 히로부미를 뒤따르던 일본인들을 향해 총을 3발 더 발사하였고, 이 총알을 맞은 하얼빈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부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禁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田中淸次郞)는 중경상을 입고 차례로 쓰러집니다.


당시 31살의 청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것을 확인하고 큰 소리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태연하게 러시아 헌병대(헌병대장 미치올클로프)에 체포됩니다. 이때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이었습니다. 한편, 총알을 맞고 치명상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곧 사망합니다.


이것이 당시 세계를 뒤흔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내용인데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쾌거는 대한제국 말 우리나라가 망국의 한으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안으로는 많은 국민들의 독립의지를 일깨우고 밖으로는 일제의 야만적인 침략행위와 우리 국민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하얼빈 의거장면 모형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 하얼빈의거 현장 상황도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의거 108주년 기념식


안중근 의사의 이러한 뜻 깊은 하얼빈의거를 기념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고자, 지난 10월 26일(목)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 의거 108주년 기념식>이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이날 기념식에는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박유철 광복회장, 김형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와 시민,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기념식은 사회자의 내빈소개를 시작으로 국민의례, 안중근 의사의 약전봉독과 의거의 이유 낭독,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기념식사, 내빈 기념사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 기념식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국민의례가 끝난 뒤 이영옥 안중근의사기념관장의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이 있었는데요, 약전(略傳)이란 “한 인물의 생애와 업적 등을 간략하게 적은 기록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어릴 적 서당에서 사서삼경·통감 등 한학을 익히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하며 호연지기를 길렀고, 16세가 되던 해인 1894년에는 아버지를 도와 본래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양민을 괴롭히던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897년에는 아버지 안태훈 진사의 영향을 받아 빌렘신부로부터 도마(토마스, Thomas)라는 세례명을 받고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서구문명의 신지식을 익혔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국권회복의 길을 찾다가 1906년 1월 부친의 별세로 뜻을 펴지 못하고 귀국해, 평안도의 진남포로 이주하여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구국운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1907년 고종황제가 폐위되고 정미 7조약의 체결로 군대마저 강제 해산되어 국권이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교육으로 백년대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당장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국외로 나가, 러시아 연해주에 있는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 선생의 후원으로 동의회를 결성하고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의병부대를 지휘해 초기에는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다수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회령군 영산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영산전투 이후 안중근 의사는 모진 고초를 겪으며 러시아 연해주의 연추(크라스키노)로 가서 의병활동을 같이할 동지들을 규합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하자, 1909년 2월경 러시아 연추의 하리 마을에서 김기룡, 조응순 등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는데요.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12명의 동지들은 태극기를 펼쳐놓고 각자 왼손가락을 끊어 그 피로써 ‘대한독립’이라고 쓰고 국권회복과 동양평화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동의단지회를 결성했습니다.


▲ 단지동맹 12인(왼쪽)과 혈서로 쓴 대한독립(오른쪽)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현장에서 러시아 헌병대에  체포되어 간단한 조사를 받은 후, 당일로 일본 총영사관에 인계되었다가 다음 날 여순 관동법원으로 이감되어 본격적인 조사와 신문을 받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의 신문과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규탄하며, 국권을 강탈한 죄, 동양평화를 파괴한 죄 등 이토 히로부미의 15가지 죄악상과 하얼빈 의거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밝히셨습니다.


▲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상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시실)


그리고 여순 옥중에서 「안응칠 소회」에 이어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한 뒤, 이토 히로부미 처단은 우리나라의 완전한 독립과 동양평화의 정착을 위한 것이었음을 주장하며, 한·중·일 3국이 나아가야 할 길 등을 제시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다가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에 이어, 한 장교가 행사에 참석한 안중근 잠수함 부대원을 대표하여  ‘의거의 이유’를 낭독하였는데요,  ‘의거의 이유’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직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직접 밝힌 것입니다. 


▲ 하얼빈 의거의 이유를 낭독하는 안중근함 부대원


이어서 김황식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의 기념식사와 내빈들의 기념사가 이어졌는데요.

가장 먼저 연단에 선 김황식 이사장은 기념식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비록 30년 6개월이라는 짧은 삶을 사셨지만 생의 전부를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바치셨다”고 하면서, “안중근 의사께서 108년 전 우리나라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고, 그의 뜻과 사상, 나라사랑 정신을 영광된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한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도 “안중근 의사는 애국혼과 인류공영의 표상으로 남으신 분”이라며,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순국선열들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게 예우를 받아야 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며, ”정부는 따뜻한 보훈 정책을 추진하여 이분들의 영예로운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끝으로, 박유철 광복회장은 “지금 우리나라는 북한의 도발로 엄정한 안보위기에 직면해 있다” 면서, “이러한 위기 극복을 위해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이어받아 국민통합을 이루자“라고 했습니다. 


▲ 기념사를 하는 김황식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왼쪽)과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오른쪽)


김황식 이사장과 내빈들의 기념사가 끝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애국・애민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여 안중근 의사의 공훈선양 활동에 기여한, 해군 잠수함사령부 소속의 안중근잠수함에 대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의 부대 표창과 김황식 이사장의 안중근장학금 전달, 서울대 남성중창단 비바앙상블의 기념공연, 대한국인 안중근 노래합창과 안응모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의 명예이사장의 만세삼창으로 기념식 행사는 모두 마무리 되었습니다.


▲ 서울대학교 비바앙상블 공연모습


▲ 기념식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는 모습


#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와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과의 만남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까지 그의 곁에서 함께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등입니다. 당시 안중근 의사와 이 세분들과의 만남 그리고 108년 전 그날의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되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크에서 1909년 10월 경,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안중근 의사는 국내 진공작전 때 의병활동을 같이 했던 우덕순과 함께 10월 21일 블라디보스크를 출발해 다음날 저녁 하얼빈에 도착하여 하얼빈국민회 김성백 회장의 집에서 묵었는데요. 하얼빈으로 오는 도중 러시아 포그라니치나야에서 동지인 유경집 선생의 아들 유동하를 러시아어 통역으로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23일,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이발을 하고 사진관으로 가서 의거결의 기념사진을 찍었는데요, 기념관 전시실의 그 당시 사진에서 의거를 앞둔 세 사람의 의지가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 3일전에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또한 안중근 의사 일행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가 하얼빈으로 와서 살고 있던 조도선을 찾아가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거사계획을 의논했는데요. 그날 밤 김성백 회장의 집에서 안중근 의사가 비장한 심정으로 의거결의를 담은 장부가(丈夫歌)를 짓자 우덕순도 거의가((擧義歌)를 지어서 화답했다고 합니다.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丈夫歌)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준비에는 연해주의 한인사회 지도자 최재형 선생의 도움도 컸다고 하며, 의거 이후에도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을 때 러시아인 변호사를 직접 준비하고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보살폈다고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준비를 마친 안중근 의사는 교차역으로서 열차가 정차하게 되는 채가구역에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역은 자신이 맡기로 하고, 통역과 두 개 역사이의 연락은 유동하가 맡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채가구역(하얼빈역의 전 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은 실패하게 되는데요. 이는 러시아 경비병이 우덕순과 조도선의 행동을 수상히 여겨, 이들이 투숙한 역구내 여관의 문을 밖에서 잠가버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안중근 의사는 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과 헤어진 후 1909년 10월 25일 오후 1시경 하얼빈역에 도착해서 다음 날인 10월 26일 오전 7시경 하얼빈역내 찻집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이후 찻집에서 나온 안중근 의사는 오전 9시 무렵, 하얼빈역에 도착하여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 앞으로 가 인사를 받기 시작하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일제의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되자 온 세계는 떠들썩했고, 동경의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 등 일본의 주요 신문들과 세계 각국의 신문들은 이를 크게 보도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같이 하얼빈의거 계획을 세우고 준비했던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지사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 하얼빈의거를 보도한 세계 각국의 신문 (출처: 안중근의사기념관)


2017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8주년 기념식은 이렇게 끝이 났는데요.

우리 모두는 안중근 의사가 108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하얼빈 의거는 대한의 독립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의거뿐만 아니라, 30년 6개월이라는 짧은 삶을 사는 동안 민권운동, 교육・계몽사업, 연해주 의병활동 등 대한제국말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위해 생의 전부를 바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겨보며, 그가 108년 전 대한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어떻게 삶을 살았는지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훈남훈녀 제10기 기자단 이지민 기자


〔참고자료〕

  1.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

  2.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http://www.ahnjunggeun.or.kr) 및 전시실 자료

  3. 박환 지음,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2013. 안중근의사기념관

  4. (사)안중근의사숭모회 펴냄, ‘대한의 영웅 안중근’ 2012. (사)안중근의사숭모회/안중근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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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과 순국


2017년 3월 26일 일요일의 이른 아침,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찾았습니다. 꽤 먼 거리였지만 따뜻해진 날씨에 기분 좋게 걷다보니 어느새 기념관에 도착했습니다. 추모식은 아침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거행되었습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안 의사 순국 107주기임을 알리는 기념관 외벽의 대형 현수막이었습니다. 현수막에 적혀져 있는,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라는 안중근 의사의 최후의 유언은 당신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 아직 모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책임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불타는 애국심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여순 관동법원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던 안중근 의사는 여순 감옥으로 면회 온 두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관동도독부 여순 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출처 : 박환 지음, 「민족의 영웅 시대의 빛 안중근」, 안중근 의사기념관, 2013년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께서는 아들이 사형선고를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안중근 의사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지 않고 순국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기념관 강당 앞의 추모식 현수막(좌)과 전시실 안 의사 유언장면(우)


안중근 의사의 순국 107주기 추모식 행사


추모식은 10시부터 시작하였지만 추모식을 시작하기 전, “안중근 의사 알리기 UCC공모전”에서 수상한 UCC영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영상의 내용 중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의거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주장한 부분과 자식의 안위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나오는 장면이 인상 깊었으며, 가슴 한 켠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오전 10시, 드디어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평화사상을 기리기 위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이 안중근의사기념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추모식에는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과 안 의사의 유족인 외손녀 황은주 여사, 증손자 안도용(미국명, 토니안), 광복회 박유철 회장을 비롯한 내빈과 학생, 시민 등 약 500여명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여 강당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습니다.  


추모식은 국민의례, 안중근 의사 약전봉독 및 최후의 유언 낭독, 행사주관 단체인 안중근 의사숭모회 이사장 및 내빈 추모사, 추모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안내 리플렛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꽉 메운 참석자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은 추모식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후 사형선고를 받아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의연함을 전혀 잃지 않으셨다”고 말하며, “국민 모두는 안 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이어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도 추모사에서, “애국혼의 표상이시며 평화론자이셨던 안중근 의사님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한다”하였고, 광복회 박유철 회장도 “안중근 의사께서 주장하셨던 동양평화론을 토대로 한․중․일 3국이 합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숭모회 안응모 이사장의 추모식사


▲국가보훈처 최완근 차장의 추모사


내빈 추모사가 모두 끝나고 추모공연으로 성악가 2명이 ‘별이 되어’와 ‘그리운 금강산’을 불렀으며, 안중근 의사의 숭모사업에 헌신하고 한․일 및 한․중 간 교류․우호증진에 공로가 있는 일본인 2명과 중국인 1명에게 국가보훈처장의 감사패가 수여되었습니다.


▲추모 공연


감사패 수여


다음으로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 및 앞서 상영되었던 UCC공모전 시상식이 진행되었고, 마지막으로 참석 내빈들의 헌화와 참석자 모두가 역사청소년합창단과 같이 ‘안중근 의사 추념가’를 제창하는 것을 끝으로 추모식 행사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글짓기 및 UCC 공모전 시상식


역사청소년합창단 추모가 합창


추모식이 끝난 후 의정부에서 온 참석자 A씨는, “안중근 의사가 꿈꿨던 갈등이 없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였고, 또다른 참석자 B씨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지 107년이 되었으나 아직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으니 후손된 한 사람으로서 많이 부끄럽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행사관계자 L씨는 “많은 국민들은 안중근 의사가 단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으로만 알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는 교육운동, 계몽활동, 국채보상운동, 의병활동, 옥중에서의 동양평화론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 나라의 독립운동을 넘어 동양평화는 물론 더 나아가 세계평화를 지향했던 평화론자였다”고 하면서, “이러한 활동을 통해 안중근 의사께서 염원하셨던 세상을 국민 모두가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하였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에게 안중근 의사는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었지만 이토 히로부미 저격 외의 활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순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기 추모식 취재를 통해,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백년대계를 걱정했던 교육가, 동양평화론을 주장하셨던 사상가이자 평화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 의사의 생애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따뜻해진 봄,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쓰다 가신 안중근 의사의 추모식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돌아올 봄에는 여러분도 추모식에 참여하여,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업적을 되새겨보며 그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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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대한의 황제를 폭력으로 폐위시킨 죄

을사늑약과 정미늑약을 강제로 체결케 한 죄

무고한 대한의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죄”


안중근 의사를 소재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웅’에 나오는 ‘누가 죄인인가?’ 노래 가사의 일부입니다. 이 노래는 실제 안중근 의사가 재판 과정에서 밝힌,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는 공연으로도 만들어져 그의 애국심과 용맹은 후대에까지 전해집니다. 이렇게 위대한 안중근 의사를 도심 속에서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바로 경기도 부천시에는 안중근 의사의 애국심과 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지하철 7호선 부천시청역 근처에 위치한 안중근공원은 시민들의 도심 속 휴식공간이자, 근대사 학습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안중근공원의 입구


‘고국으로 돌아온 대한제국의 영웅(안중근공원이 세워지기까지)’


▲안중근 의사의 동상 from 하얼빈


원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지난 2006년 1월 16일, 안중근 의사의 순국 96주기를 맞아 하얼빈시 중심가 ‘중양다제(中央大街) 광장’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동상은 안중근의사숭모회와 재중국 사업가 이진학 회장 등 민간차원에서 안중근 의사의 뜻을 기리며 세운 동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얼빈에 있어야 할 이 동상이 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것일까요? 여기, 안중근 의사 동상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상제막식을 하고 11일 후, 중국중앙정부는 외국인 동상건립을 불허한다는 방침을 내세우며 안중근 의사의 동상 건립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사전에 하얼빈시 지방정부와 협의를 한 상태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상은 천으로 가려졌고, 중국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근처 백화점 안으로 옮겨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의 송환 역시 부지확보 등의 문제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10월 26일, 부천시의 ‘중동공원’이 동상의 부지로 정해집니다. 부천시 측은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 현장인 하얼빈에서 돌아온 안 의사의 동상을 하얼빈의 자매도시인 부천에 영구히 보존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동상 유치 이유를 밝혔습니다. 이후 ‘중동공원’은 ‘안중근공원’으로 개칭되었고, 안 의사의 동상은 이곳에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늠름한 모습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에서 그분의 애국심과 독립을 향한 투철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중근의사가 들려주는 그분의 인생이야기’


▲이 조형물에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안중근공원에 들어서면 큰 조형물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조형물은 안중근 의사의 인생을 그리고 있는데요. 사실적인 철제 부조물과 조형물에 새겨진 설명은 안 의사의 생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사진 속의 소녀들이 바라보고 있는 손 모양의 구조물은 안중근 의사의 상징인 ‘단지혈맹’을 잘 나타냅니다. 그럼 그 내용을 볼까요?


그분은 정말 우리 민족만을 위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꿈이 있다면 조국의 독립이었고, 그것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안 의사는 국가의 힘을 키우는 것이 최우선이라 생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삼흥학교’, ‘돈의학교’ 등의 학교를 운영하며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대한의군 참모 중장으로서 북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의병들을 양성하며 무장독립투쟁에도 힘썼습니다. 


▲이토를 저격하는 안중근의사.


또한, 안중근 의사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Корея ура! Корея ура!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 대한 만세!)”


당시 하얼빈역에는 그분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7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3발, 그외 일본 측 인사 4명은 각각 1발의 총탄을 맞았다고 전해집니다. 저격 시 사용했던 벨기에 FN사의 ‘브라우닝 M1900’ 권총도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함께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안중근의사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


안중근공원에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 작품들을 새겨놓은 비석들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대부분이 1910(경술년) 2월부터 3월 26일 순국 직전까지 쓰여진 것으며, 모두 200여 점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 의사는 어려서부터 배운 한학을 토대로 선현들에게 듣고 배운 문장들을 독창적으로 인용하여 촌철살인의 경구로 구성해냈습니다. 이 유묵 작품들에는 모두 낙관 대신 단지혈맹의 상징인 왼쪽 수인이 찍혀있습니다. 그분의 글귀와 시구에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곧은 기개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 안중근 의사의 주옥같은 글귀들을 몇 가지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황금백만불여일교자(黃金百萬而不如一敎子)

- 황금백만냥도 자식하나 가르침만 못하다.


▲국가의 독립을 위해 교육을 중요시 여겼던 안중근 의사의 뜻을 알 수 있다.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교육의 으뜸이 독서임을 강조했던 안중근의사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던져라.


▲안중근 의사의 독립에 대한 가치관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 

-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자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진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가 순국 직전에 한 유언


안중근 의사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오직 우리 민족과 독립만을 생각했고, 안타깝게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수많은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 덕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현재 우리가 자유로이 생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한 그루의 벚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뿌리가 없으면 나무줄기가 힘차게 서 있을 수 없고, 나무줄기가 없으면 나뭇가지가 하늘 높이 솟아날 수 없고, 나뭇가지가 없으면 봄에 아름다운 벚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흘렸던 피와 눈물을 딛고 지금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며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것이야말로,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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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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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벚꽃엔딩~

    2017.03.29 19: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사 잘 봤습니다~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동상이 부천시로 옮겨지게 된 사실도 기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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