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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은 우리 민족에게 뼈아픈 슬픔을 안겨준 날의 시작입니다. 6.25전쟁, 이 전쟁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과의 전투를 역전시킨 작전이 바로 맥아더 장군이 진두지휘한 인천상륙작전인데요. 하지만 유엔군과 한국군의 합작 작전 전에 한국군이 단독으로 감행한 전투가 있습니다.

 

바로 통영상륙작전인데요.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6.25전쟁 중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최초로 적전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통영을 탈환한 작전입니다. 오늘은 한국 해병대의 위엄을 보여준 통영상륙작전에 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 6.25전쟁의 시작과 북한군의 전세

 

▲ 통영상륙작전 전투지 앞바다 (출처 : 국가보훈처)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발발한지 두 달여 만인 8월에 접어들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으로 인해 전선은 남측의 낙동강을 중심으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남한 측은 낙동강에 가까스로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이미 국토의 90% 이상을 점령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최후의 방어선이었고 그만큼 모든 전력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의 돌파가 불가능함을 알고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무방비상태였던 통영지역으로 남하하여 8월 17일 통영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통영을 점령하자 북한군은 후속부대를 계속해서 투입하여 통영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됩니다.

 

북한군의 통영반도 점령은 낙동강 방어선의 무력화 때문이었는데요. 낙동강 군병력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는 거제도와 그 일대인 마산, 진해까지 봉쇄하는데 통영이 최적의 거점지였기 때문입니다.


# 북한군의 통영반도 점령과 국군의 움직임

 

▲ 당시 작전 상황도(출처 : 통영상륙작전기념관)

 

통영반도의 점령을 시작으로 북한군 7사단이 거제까지 침입해오자 한국군은 거제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를 출동시키게 됩니다.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합니다. 
 

▲ 故 김성은 중장 (출처 : 에코비전21)

 

김성은 부대는 해군의 엄호 사격 속에 다음 날 아침까지 통영항구 정면에서 육지를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고, 거제도 방어를 위해 투입된 김성은 부대는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그 일대를 탈환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하여 오히려 통영을 직접 탈환하겠다는 공격 작전을 상부에 건의했습니다.

 

▲ 통영반도 지도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이에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 함정 및 평택호 등의 지원 엄호 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쪽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고성에서 통영읍으로 진입하는 원문고개를 확보한 뒤 적의 진격을 차단했습니다. 또한 통영일대의 시야가 확보되는 망일봉을 미리 점령하여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북한군 100여 명을 사살, 통영을 완전히 탈환하게 됩니다.

 

# 6.25전쟁 최초 단독 상륙작전, 통영상륙작전의 의의


▲ 통영상륙작전 기념비 (출처 : 국가보훈처)

 

이 전투는 유엔군 등의 도움 없이 한국 해병대가 최초로 단독으로 수행한 상륙작전이자, 지역탈환상륙작전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큰 전투이며 유엔군을 방어하기 위한 철수작전 중 유일한 공격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큽니다.

 

또한 통영상륙작전의 승리로 후에 6.25전쟁 역사에 길이 남을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맥아더 장군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요. 맥아더 장군은 이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군사병력을 차출하여 선봉대로 투입시켰습니다. 이들은 서울수복작전에서도 그 공을 세워 한국전쟁을 국군에게 유리한 전세로 돌려놓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를 취재하던 당시 뉴욕타임즈의 외신기자 마거릿 히긴스는 김성은 부대에 대해 ‘귀신도 잡을 만큼 놀라운 일을 해냈다’는 기사를 전했고, 이로 인해 한국 해병대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별명이 붙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출처 : 통영상륙작전 기념관)

 

6.25전쟁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이자, 대한민국 해병대의 위용을 높이는 칭호까지 얻게 된 통영상륙작전의 성공은 무더운 이 여름, 호국영웅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외신은 통영상륙작전이 실패했다면 한국전쟁의 판도는 바뀌었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준 호국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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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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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님들! 저희 4조의 팀미션 기사 주인공의 본격적인 소개에 앞서, 인물 문제를 준비해 왔습니다.



위의 문제, 다 맞히셨나요? 1번의 사진 속 인물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입니다.


그런데 2번의 인물은 조금 생소하시죠? 이 분은 맥아더 장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손원일 제독입니다. 저희 국가보훈처 제10기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4조는 팀미션의 주제로 6.25전쟁의 숨은 영웅,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 손원일 제독, 대한민국 해군을 이끌다!


                          

“사랑하는 조국이여, 우리에게 배를 주소서!

배가 없이는 바다에서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 故 손원일 제독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자이자 초대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은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 해군을 이끌었던 분입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일 벌어졌던 최초의 해전, 대한해협해전에서의 승리는 손원일 제독의 노력이 빛을 발한 사건이었습니다. 


▲ 한국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당시 우리나라 해군은 경비정만이 있을 정도로 열악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손원일 제독은 ‘함정 건조 기금 각출 위원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손 제독은 사비를 털어 모금하였고 이에 고위 간부를 비롯해 말단 장병, 생도까지 봉급의 일부분을 기금으로 내었는데요. 이후 국민들도 모금에 동참합니다. 그리하여 1949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해군의 첫 전투함, 백두산함(PC-701)이 탄생하였습니다.


손원일 제독과 해군, 국민 모두가 각고의 노력 끝에 도입한 백두산함은 6.25전쟁 발발 당일, 동해로 긴급히 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부산 동북방 해상에서 무장병력 600여 명이 탑승하고 남하하는 1,000톤급 북한 무장수송선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해군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악천후 속에서, 혼신의 전투 끝에 북한 함정을 격침했습니다. 


이 대한해협해전의 승리로 6.25전쟁 초기, 적 게릴라에 의한 후방 교란을 미연에 방지하였고, 유엔군 179만 명의 병력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부산항으로 무사히 수송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한해협해전의 승리가 6.25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 인천상륙작전간 함상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출처: 국가기록원)


이후 손원일 제독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우리에게 많이 알려졌듯이, 6.25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작전이었습니다.


손원일 제독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큰 공헌을 한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할 당시, 정보가 부족하여 작전에 급제동이 걸린 상태였는데요.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인천 지역의 첩보 수집 임무를 수행할 ‘해군 17인의 결사대’를 극비리에 조직합니다. 일명 ‘엑스레이작전(X-Ray Operation)’이었습니다. 엑스레이 작전은 인천 앞바다의 영흥도를 거점으로 한 달여 동안 벌어진 해군의 첩보전을 일컫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엑스레이 작전을 통해 극비리에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고 이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손원일 제독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을 때는 국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 했다.”라는 포고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해군 초대 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하고 기틀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해군과 해병대를 이끌고 전장의 최일선에서 적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대한민국은 손원일 제독이라는 훌륭한 리더가 있었기에 우리의 바다를, 우리의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 진해 기지 사령부에 위치한 손원일 제독 동상(출처: 해군 공식 블로그)


그의 x-ray작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기념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6.25 전쟁은 맥아더 장군의 승리도, 손원일 제독의 승리도 아닙니다. 그들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맡은 바에 최선을 다했던 수많은 호국용사들이 노력이 합쳐져 만든 성공이었지요. 


그동안 여러분은 6.25전쟁과 관련된 인물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셨나요?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에는, 저희가 소개해 드린 손원일 제독을 포함한 6.25전쟁 국군 참전 용사 분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을 마음에 새기며 기억하는 것으로 감사함을 전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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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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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평택에서 출생한 김창학 해군 하사는 1948년 6월 해군 신병 제10기로 입대하여 제1함대 PC-701 백두산함의 조타수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1950년 6.25전쟁 발발 당일, 백두산함은 부산 동북방 30마일 해상에서 병력 600여 명과 탄약, 식량 등의 전쟁 물자를 가득 싣고 남하 중인 1천톤 급의 북한 무장선박과 조우하게 됩니다.


곧 북한 선박과 백두산함 간의 치열한 해상 교전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김창학 하사는 교전 중 적탄에 의해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상황에서도 조타기를 놓치 않았는데요.

긴급히 조타실로 달려온 함장의 손을 붙잡고, 김창학 하사는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함장님, 끝까지 싸우지 못해 죄송합니다"


국군은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전투 끝에 적의 선박을 격침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김창학 하사는 심한 부상으로 대한해협해전 승리 후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 전사하였습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해군은 지난 2013년 진수된 유도탄고속함 14번함을 '김창학함'으로 명명하였는데요.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사명감으로 끝까지 조타기를 놓지 않고 임수를 수행했던 김창학 하사. 6월 호국보훈의 달의 마지막 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김창학 하사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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