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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어느덧 무더운 더위가 찾아온 6월입니다.

6월은 훈터 독자 여러분들과 저희 훈남훈녀 기자단에게는 더욱 의미 깊은 달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바로 호국보훈의 달이기 때문입니다.

6월에는 현충일과 6.25전쟁 발발일이 있는 만큼, 사람들에게 보훈에 대해 다시 한 번 일깨워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6월에 방문하기 좋은 현충시설에는 어떤 곳이 있을까요? 저는 이번에 저의 고장, 계룡시에 있는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충령탑’에 대하여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다른 지역에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충령탑이 있는데요, 육해공 삼군의 본부가 한 곳에 위치한 국방의 도시 계룡시에 있는 충령탑은 더욱 그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됩니다.


▲ 충령탑 가는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


버스를 타고 엄사네거리 정류장에서 내려 5분 정도 쭉 직진하면 한 커피숍 맞은편에 위와 같은 표지판을 볼 수 있는데요, 충령탑은 엄사근린공원 정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 충령탑을 올라가는 계단


정상으로 가기 위해서 제가 추천하는 길은 공영주차장으로 들어가시면 보이는 계단입니다. 다른 길보다 빠른 시간에 힘을 덜 들이고 가실 수 있는데, 제일 안쪽에 있는 길이라 못 보시는 분들도 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방문하신다면 이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시길 추천드립니다.


▲ 충령탑


계단을 따라 올라가시면 충령탑이 보입니다. 사진으로도 탑의 웅장한 기운이 느껴지시죠?


▲ 충령탑의 설명


충령탑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영령들의 혼을 모신 곳입니다.

이 탑은 2007년 6월 5일에 세워져 어느덧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국영령들의 혼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위패 봉안소에서는 호국영령 55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또한 매년 6월 6일 현충일에 이곳에서 호국영령들을 기리고 그 뜻을 드높이는 추념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둥글게 높게 솟아 있는 탑신이 보이시나요? 이 탑신은 열 개로 분리되어 솟아있는데 이 숫자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열은 우주를 나타내는 수이며 동양 사상에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합일의 신성을 의미합니다. 저는 탑신의 숫자에 얽힌 의미를 알고, 열 개의 탑신이 호국영령들이 과거의 시간적 한계를 초월하여 현재에도 의미가 있길 바란다는 소망을 담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한 탑신의 형태를 살펴보면 익숙한 무언가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탑신의 모양은 배흘림기둥에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때문에 한국적인 전통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게다가 탑이 솟아오를 것 같은 역동성이 묻어납니다. 이 탑신은 하늘을 향한 인간의 염원을 형상화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탑신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의 감사하는 마음이 하늘에 계신 호국영령에게 닿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계룡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금계포란형이며 삼태극의 발원지인데요. 위패 봉안실 및 기단은 이를 나타내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기단에는 삼태극의 조각이 배치되어 계룡의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또 위패 봉안실은 금계포란형의 알이 구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저는 구에 담긴 위패를 하나하나 자세히 바라보며 호국영령들께 감사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 열 개의 탑신이 위패 봉안실을 품고 있는 모습, 보이시나요?


전체적으로 바라보자면 열 개의 탑신이 중앙의 위패 봉안실을 품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는 비룡승천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충령탑을 바라보니 호국영령들의 혼이 우리의 보훈에 힘입어 멋지게 승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충령탑은 근린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엄사 시민분들이 운동을 하시거나, 벤치에서 휴식을 취하는 등 충령탑과 어울려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지역 시민의 가까이에 있는 충령탑이라 그 의미가 더 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근처에 있던 시민 한 분께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 인터뷰에 응해주신 시민, 최수웅 님


Q. 안녕하세요.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네, 안녕하세요. 엄사리에서 숙박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최수웅이라고 합니다.


Q. 평소 근린공원에 자주 방문하시나요?

A. 네, 아무래도 공원에 운동 기구도 있고, 쾌적하게 조성해 두었기 때문에 자주 오는 편입니다. 


Q. 혹시 충령탑에 대해서 알고 계셨나요?

A. 공원을 자주 방문하다 보니, 충령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매년 현충일에 이 탑 앞에서 호국영령을 기리는 행사가 진행되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Q. 충령탑에 깊은 애정이 느껴지는데요, 탑을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A. 참 많은 생각이 들죠. 탑을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나라를 위해 모든 걸 바친 유공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탑을 보면서 이분들을 기리고 감사해하곤 합니다.



짧은 인터뷰였지만 충령탑에 대한 애정, 호국영령에 대한 감사함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나 공원에 대한 관심도 많으신 분이라 여러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계룡 시민으로서 저도 우리 고장의 현충‧보훈 시설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입니다. 독자 분들도 함께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참고자료

충령탑 전시자료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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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향, 또 살고 계신 지역에는 보훈과 관련된 어떤 현충시설이 있나요?

훈남훈녀 기자단으로서 제 고향의 현충시설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 저는, 충청남도 계룡시에 있는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에 방문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이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과 독립운동가 한훈 선생에 대해서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그럼, 잘 따라와 주세요!


 ▲기념탑에 새겨진 광복단 결사대, 광복단, 광복회, 조선독립사령부의 이름


 대한 광복단은 삼남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에 힘쓴 단체입니다. 대한 광복단은 비밀 결사대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베일에 싸인 단체이죠. 그리고 이러한 대한 광복단의 계승 단체가 광복단 결사대입니다. 그럼 한훈 선생과 그가 헌신한 광복단, 광복회, 광복단결사대의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훈선생의 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한훈 선생은 충남 청양 출신의 독립운동가입니다. 한훈 선생은 1890년 2월 27일 태어나 1906년 홍주의병이 일어났을 때 17세의 어린 나이로 참여하였습니다. 선생은 홍주의병 당시 이용규 휘하에서 소모장으로서 부여, 노성, 연산, 공주 등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5월 말 홍주성이 일본군에 점령되는 것으로 홍주의병은 실패합니다. 그 후 선생은 신도안에서 몸을 숨기고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나철, 오기호 등과 함께 오적 처단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그러나 나철 등이 일경에게 체포됨에 따라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선생은 1913년 풍기광복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과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연합한 대한광복회에도 참여합니다. 1916년 선생은 보성의 양재성과 벌교의 서도현을 처단하였고, 서인선을 납치하여 1만원의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오성 헌병분대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경북 칠곡의 부호 장승원, 충남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 사건을 계기로 대한광복회 조직이 드러나자 선생은 체포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일경의 포위망도, 만주에의 망명도 선생의 독립을 향한 의지를 꺾지 못했습니다. 한훈 선생은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나 광복단 결사대 조직을 협의하고 국내로 잠입했습니다.

 

▲김상옥 선생과 한훈 선생 (출처: 독립기념관)


그러던 한훈 선생은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요인과 친일파 처단을 위해 활동을 시작한 옛 풍기광복단의 동지 김상옥을 만났습니다. 두 선생의 단체는 연합하여 첫 거사로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내한했을 때 환영 나온 조선총독, 정무총감 등 일제요인들을 처단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암살단 취지서, 통고문, 경고문을 배포하고 총독과 일본 관리들을 폭탄으로 처단하며 일본경찰서, 관공서 등을 폭파할 계획을 구상했습니다.

 

▲한훈 선생의 체포 소식을 담은 기사 (출처: 독립기념관)


군등(君等)은 조선의 혈통을 받고 배달민족이란 긍지 아래 살아 왔거늘 어찌하여 부모의 육신을 깎고 형제의 피를 빠는가! 하늘이 뜻이 있다면 어찌 천벌이 없을 것이며 신(神)이 뜻이 있다면 어찌 재앙이 없을 소냐! 아 금수(禽獸)만도 못한 어리석은 무리여 그러고도 오히려 생명을 보존코자 하니 개탄치 않을 수 없다. 한번 기회가 오면 누가 너희들의 일편 고기를 회치고 싶지 않을 자 있으며, 한 줌의 소금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는 자 있으랴! 그 후에 남을 너희들의 자손은 또한 어이 하려나?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보내려는가? 또 어느 지옥의 한 모퉁이에 방황케 하려는가? 오늘날 저 철창에서 신음하는 형제자매들은 모두 누구 때문인가?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사(義士)들이거늘 군들은 이 의혼(義魂)을 죽이는 마귀에 그치려는가? 더 말하지 않겠노라. 부모를 모시고 처자를 거느린 자로서 너희들이 차마 할 수 있는 행동인가 깊이 생각하여 보라. 그러고도 오히려 너희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믿는 대로 행하여 보라.

광복단 결사대가 거사를 앞두고 조선인 형사에 보낸 경고문


그러나 미국의원단 도착을 단 하루 남겨두고 일경의 검속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한훈 선생과 광복단 결사대원, 암살단원들이 체포됨에 따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한훈은 원래 이 사건의 중요한 수령이니만큼, 답변할 때 태도가 매우 냉담하야 다른 피고와 같이 허둥지둥하지 아니하며 피고석에 꼿꼿이 앉아서 입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보도


한훈 선생은 합계 13년 형을 선고받습니다. 선생은 192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으며 이후 충남 신도안에서 은거하게 됩니다. 선생은 학병 거부자, 탈출병 등의 은거를 돕고 그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그렇게 광복을 맞은 선생은 광복단을 재건합니다. 그리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단결과 민족교육과 산업의 부흥을 위해 노력합니다. 이렇게 여러 활동을 하던 중 선생은 6.25 전쟁에서 북한군에 납치되어 피살되었습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을 담은 사진


충남 계룡산의 신도안은 1920년 결집한 광복단 결사대의 발원지입니다!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은 광복단 결사대를 기념하고 충청도의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습니다.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의 자유의 날개


불꽃과 날개가 어우러진 탑신이 웅장해 보이며, 금방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오를 듯합니다. 이 날개는 항일독립운동의 뜨거운 열정과 그 드높은 기상을 나타냈다고 합니다.

 

▲인물 군상


좌측의 인물 군상은 일제강점기의 고난을 넘어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의 희생과 투신을 나타내었습니다. 우측의 인물 군상은 광복단 결사대가 지향했던 민족의 안녕을 나타냈으며 민족정신을 올곧게 수호해나가는 의지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자유롭게 두 날개를 활짝 편 기념탑을 바라보며 저는 지금의 자유를 주신 한훈 선생과 광복단 결사대의 선열들께 감사의 묵념을 했습니다. 이 기념탑은 민족 공동체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투신했던 결사대의 숭고한 정신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기를 염원하는 분들이 정성스런 마음을 모아 세웠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그러한 바람에 부응하여 광복단 결사대와 한훈 선생에 대해 기억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제에 의해 조직의 맥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다시금 결집하여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해나간 한훈 선생. 그 끊임없는 노력은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한훈 선생의 독립에 대한 헌신이 수년이고 지속된 만큼 저는 계속해서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기사에서 여러분께 저희 고장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와 단체를 소개해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는 다시금, 여러분의 고장에는 어떤 사적지와 현충시설이 있는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우리 고장에 어떤 현충시설이 있는지 살펴보고, 알아보고, 기억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독립기념관

국내 현충시설 정보서비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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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천만 관광지로 자리 잡은 전주 한옥마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관광지 중 하나입니다. 지금의 아름다운 한옥마을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우리 선열들의 값진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과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 알고 계시나요?

이번 기사에서는 한옥마을 속 숨겨진 우리 선열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보려 합니다. 


한옥마을이 품고 있는 고즈넉한 문학의 향기! 가람 이병기


▲ 한옥마을의 전통 숙박업소로도 사랑받고 있는 양사재


양사재는 서당 공부를 마친 유생이 본격적으로 진사 시험을 준비하던 곳입니다. 세월이 흘러 진사 시험을 공부하던 유생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엔 우리 민족 문학 부흥에 앞장섰던 가람 이병기 선생의 향기가 물씬 풍깁니다.


▲ 가람 이병기 선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가람 이병기 선생은 술과 난초, 매화를 사랑하는 문인이자 평생을 우리 국문학에 힘써온 학자입니다. 192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선어문연구회, 시조회를 창립해 고유한 민족 문학의 한 장르인 시조의 발전에 노력했습니다. 1930년대에는 진단학회 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르며 잔혹한 고문을 겪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은 대학에 재직할 당시 양사재에서 머물렀는데 그가 있던 방을 지금은 가람 다실이라 부릅니다. 양사재에서 하루 머무르며 전통 한옥체험도 즐기고, 가람 선생의 향기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향교를 지켜낸 선비정신! 고재 이병은 선생


▲남안재의 모습


양사재를 지나 전주 교육의 중심 향교. 우리 선조들의 교육현장을 보고 뒷길로 나오면 정갈하게 기와가 올려진 돌담길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골목골목 구경을 하다 보면 소박하지만 예스러운 멋을 품은 장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바로 고재 이병은 선생이 심성을 수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남안재’입니다. 남안재는 고재 이병은 선생이 완주 지역에서 강학을 했던 장소로, 고재 선생이 전주 향교로 오면서 이곳을 통째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남안재는 일제강점기, 항일 의지를 도모하고 무리 민족의식을 보존하는 장소였습니다.


▲ 남안재 뒤편에 있는 남양사


고재 이병은 선생은 호남 삼재 중 하나로, 강인한 선비 정신을 가지고 일관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정신이 투철하여 단발령을 거부하고 일제에 맞서 적극 항거했습니다. 고재 선생은 조희제 선생의 염재야록에 발문을 쓰기도 했는데요, 이 때문에 임실 경찰서에 구속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선생은 광복 이후 전주 향교의 재건에 앞장섰습니다. 고재 선생이 일생을 보내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남안재에는 현재 후손들이 거주하며 고재 선생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편엔 고재 선생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남양사가 세워져있습니다. 향교 뒤편 우뚝 솟아있는 모습을 보니 고재 선생이 전주 향교를 굽어보며 지켜주고 있는 듯합니다.


한벽당을 지켜낸 기개와 강직함! ‘금재 최병심 선생’


▲ 한벽당의 모습


한옥마을의 대표 관광명소 중 한 곳인 한벽당. 이곳은 예로부터 전주의 멋과 풍류를 상징하는 장소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습니다. 또한, 이곳에 올라 바라보는 전주천의 경치가 뛰어나 ‘한벽청연’이라 불리며 전주 8경 중 하나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일제는 이곳에 전라선 철로 개설을 구실로 한벽당을 헐어 민족정기를 끊으려 했는데요. 이때, 일제 만행에 맞서 한벽당을 지켜내고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선 선비가 있습니다. 바로 호남 삼재라 불리며 한옥마을에서 활동했던 금재 최병심 선생입니다. 


▲ 금재 최병심 선생 초상화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선생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의병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또한, 민족의식을 보전하고 계승하기 위해 옥류정사를 세워 꾸준히 후학을 양성해, 전주 지역 항일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920년엔 조희제 선생이 일제의 야만스러운 행위를 담은 책 ‘염재야록’의 서문을 썼다는 이유로 일경에 잡혀갔지만 오히려 단식으로 항거하기도 했습니다.


▲ 금재 최병심 선생 묘소


금재 선생이 살던 고택은 전통문화센터가 되었고, 염수당도 사라졌지만, 선생이 지켜낸 한벽당은 여전히 전주의 풍류를 상징하며 위풍당당히 서있습니다. 그리고 선생을 기리는 사당과 묘소는 오늘도 한옥마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묘소 앞, 잠시 고개를 숙이고 금재 선생에게 감사 인사를 드려봅니다.


▲ 남양사에서 내려다 본 한옥마을의 모습


이처럼 한옥마을 구석구석에는 이곳을 사랑했던 우리 조상들의 혼과 얼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운 한옥의 모습 속에 담긴 숭고한 이야기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이 마음을 뭉클하게 해주는데요.

완연한 봄날, 바쁜 일상과 밀려오는 나른함에 지쳤다면 고즈넉한 한옥마을을 거닐며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정신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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