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5,946,884
  • Today | 750
  • Yesterday | 2,998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올해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이라는 것, 잘 알고 계시지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일 년 앞둔 해인 올해, 우리의 뿌리를 찾고 알아본다면 100주년을 더 뜻깊게 맞이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무장투쟁에서의 우리의 뿌리를 찾아보고자 육군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99주년을 맞아 <독립군·광복군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라는 주제의 특별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이 특별전에서는 독립군과 광복군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 독립운동가의 흉상들


육군박물관의 정문에는 광복을 이끈 독립운동가들의 흉상이 있습니다.

왼쪽부터 홍범도 장군, 지청천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인데요, 무장독립운동사에 방점을 찍은 분들을 한 번에 마주할 수 있는 육군박물관의 풍경은 가히 압도적이었습니다.

전시회를 관람하기 전부터 이렇게 선열들을 마주하니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특별 전시회를 살펴볼까요? 특별 전시회는 의병·독립군실, 광복군실, 안중근 장군실의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 유물은 모두 70여 점으로 국내 1점밖에 없는 한국광복군의 군복과 지청천 장군의 친필 일기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병, 망국의 밤을 깨치고 일어나다


▲‘머지않아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불원복 태극기


19세기 말, 날이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던 일본의 침략 야욕에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들이 무장하고 일어나 싸웠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 활동은 고조되었습니다.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된 뒤에는 반발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고, 이로 인해 의병 조직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의병사에 길이 남을 전투로는 서울 진공 작전이 있습니다. 비록 신식 무기를 가진 일본군 앞에서 스러져 갔지만 의병들의 투신은 당대 많은 사람들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이후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수많은 의병들이 피해를 입었지만, 의병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계속해서 싸우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또 의병들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으로 변모하기도 했습니다. 


독립군, 광복의 새벽을 열다

   

▲ 사열중인 독립군의 모습 (출처: 독립기념관)


▲ 독립군의 기념사진 (출처: 독립기념관)


사열 중인 독립군의 보무가 참으로 당당해 보이지 않으시나요? 의병에 이어서는 독립군이 일제의 통치라는 짙은 안개를 뚫고 일어났습니다.

독립군은 일제에 항거하여 결집한 여러 무장단체, 군정부 조직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독립군 부대로는 대한 독립단,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등이 있습니다.

                         

▲ 독립군이 사용했던 소총과 권총


독립군이 사용했던 소총과 권총을 직접 사진을 통해 살펴보면서, 저는 이 독립군이 활약한 여러 전투들을 떠올렸습니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여러분도 익히 들어보셨을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이 있습니다.


신대한국 독립군의 백만용사야

조국의 부르심을 네가 아느냐

삼천리 삼천만의 우리 동포들

건질 이 너와 나로다


노래 한 곡조로 독립군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 싶습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에서 망국의 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굳게 다잡았던 독립군의 강건함이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조국의 부르심에 삼천리 이천만의 동포를 구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았던 독립군들을 기억해주세요.


광복군이 밝힌 광복의 아침


▲ 광복군 군복과 광복군 직책 임명장


이 옷이 무엇인지 짐작이 가시나요? 보기만 해도 선열의 얼이 느껴지는 이 옷은 국내에 1벌 남은 광복군 군복 진품입니다. 이 광복군 군복은 저에게 시대를 뛰어넘어 나라사랑의 정신을 알려주었습니다.


▲ 한국광복군 성립전례식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군대로, 1940년 창설된 정식 국군입니다. 대한제국의 국군과 독립군을 계승해 창설된 것에서 역시 우리의 뿌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복군은 본래 중국의 지원을 받고자 했지만, 중국정부가 예속의 손길을 뻗치자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으로 창설되었습니다.


▲ 광복군이 사용했던 개런드소총, 아리사카99소총, M3기관단총


광복군이 적극적으로 모색했던 작전 중에서 저는 국내진입작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국내로 진공하고자 하는 국내진입작전은 미국과의 연합관계 속에서 준비되었습니다. 비록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실제로 우리 민족의 땅에 발을 디뎠다는 점에서 저는 국내 정진대의 그 시도가 참 가슴에 남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지청천 장군의 투신


▲ 안중근 의사에 대한 설명


▲ 하얼빈 의거


다음으로는 제가 육군박물관을 관람하며 특히 인상 깊었던 인물인 안중근 의사, 지청천 장군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안중근 장군실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전시물이 가득했습니다. 저는 이 전시물들을 차근차근 살펴보며 안중근 의사의 투신에 대해 알아보고 그의 의거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 안중근 의사 의거 당일의 하얼빈 역 (출처: 독립기념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 침략에 관한 정책을 협상하기 위해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를 만나고자 길을 떠납니다. 안중근 의사는 이에 이토 히로부미 처단을 계획하고 10월 22일 하얼빈의 땅을 밟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0월 26일. 역사적인 의거의 날이 밝았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계획대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발사했습니다. 즉시 호위병들에게 체포된 그는 "코레아 우라! (대한 만세)"라 외쳤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총탄에 맞아 숨졌고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하셨습니다.


▲ 안중근 의사의 것과 동종의 권총들


왼쪽의 권총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의거 당시 사용한 것과 동종인 브라우닝 M1900 권총이고, 오른쪽은 의거 당시 예비로 준비한 것과 동종의 권총입니다.


▲ 안중근 의사 소지 권총 (출처:독립기념관)


비록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사용한 권총은 전하지 않으나, 동종의 권총을 보시니 하얼빈 의거가 한층 생생하게 다가오지 않으시나요?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염원을 담아 이것과 같은 권총을 꽉 쥐고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렸을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 지청천 장군 (출처: 독립기념관)


지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교장으로서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다하신 분입니다. 또한 지청천 장군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서 눈부신 활약을 이어나갔습니다. 광복 후에는 청년단체의 연합체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셨습니다.


▲ 지청천 장군 일기


이 유물은 지청천 장군의 일기입니다. 독립운동의 기억이 고스란히 적혀있을 이 일기를 바라보면서, 저는 이 특별전 자체가 우리나라 무장투쟁기를 적어낸 한편의 일기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장투쟁의 일기는 고난의 연속이었고,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었습니다. 저는 관람을 마치고 육군박물관에서 걸어 나오면서 앞으로도 피와 땀에 젖은 그 일기를 꼼꼼히 읽어나가야겠다고, 다시 말해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기억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육군의 뿌리이며 광복의 아침을 연 독립군과 광복군의 활약상과 그들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이 특별전시회는 12월 30일(일)까지 이어집니다. 전시를 관람하여 더욱 많은 국민들이 나라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독립군과 광복군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참고자료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육군박물관 전시자료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봉오동 전투의 전개


오늘은 봉오동 전투 전승 9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20년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명 가량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문 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 중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추격에 나섭니다. 이들은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이에 독립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뒀으며, 이것이 삼둔자 전투입니다. 독립군을 격파하고자 했던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하자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 현장(출처: 독립기념관)


삼둔자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중대의 병력을 포함한 대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변의 온성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전

일본군이 병력을 재정비하고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온다는 상황을 보고받은 홍범도,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마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명령을 내린 후 구체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해 있는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면 일시에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6월 7일 오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를 수색했지만 독립군이 보이지 않자 독립군 모두 도주한 것으로 착각한 채 매복지점까지 진입했습니다. 


▲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의 공격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신호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사방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가했습니다. 일본군 역시 기관총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 밀려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전투가 진행 중이던 4시 40분경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지자,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이 틈을 타 일본군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는데요. 

이로써 독립군을 소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일본군은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죠.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전초전을 마련하였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6월 7일, 오늘은 일제에 맞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만주에서 맹활약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처음 충돌하여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지 97주년이 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인 봉오동 전투,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 사이트

독립기념관, 제22권 3.1운동 직후 무장투쟁 제 3장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 전투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영웅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6월 호국보훈의 달 감사댓글 이벤트, '호국보훈의 달, 한 방에 정리!'
국가유공자에 대한 예우 강화, ‘국가유공자 사망시 대통령 명의의 근조기를 증정합니다’
광복단 결사대 기념탑에서, 한훈 선생과 광복단 결사대의 투신을 알아보다
'호국보훈의 달', 기억하고 감사하고 추모하는 6월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