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tal | 4,874,585
  • Today | 2,163
  • Yesterday | 3,943



# 봉오동 전투의 전개


오늘은 봉오동 전투 전승 9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20년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명 가량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문 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 중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추격에 나섭니다. 이들은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이에 독립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뒀으며, 이것이 삼둔자 전투입니다. 독립군을 격파하고자 했던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하자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 현장(출처: 독립기념관)


삼둔자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중대의 병력을 포함한 대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변의 온성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전

일본군이 병력을 재정비하고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온다는 상황을 보고받은 홍범도,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마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명령을 내린 후 구체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해 있는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면 일시에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6월 7일 오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를 수색했지만 독립군이 보이지 않자 독립군 모두 도주한 것으로 착각한 채 매복지점까지 진입했습니다. 


▲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의 공격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신호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사방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가했습니다. 일본군 역시 기관총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 밀려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전투가 진행 중이던 4시 40분경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지자,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이 틈을 타 일본군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는데요. 

이로써 독립군을 소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일본군은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죠.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전초전을 마련하였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6월 7일, 오늘은 일제에 맞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만주에서 맹활약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처음 충돌하여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지 97주년이 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인 봉오동 전투,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 사이트

독립기념관, 제22권 3.1운동 직후 무장투쟁 제 3장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 전투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지난 10월 25일은 대한민국 무장투쟁사의 가장 빛나는 승리,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전투에서 맹활약한 홍범도 장군이 순국한 날입니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총사령관으로서 맹활약했던 무장투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을 추모하고 그의 삶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위한 추모식 및 학술회의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는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과 강정호 대한민국 해군 홍범도함 함장 등 130여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총 2부로 나뉘어 1부는 추모식을, 2부에는 학술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제1부. 백두산 호랑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을 추모합니다.


1부는 홍범도 장군의 추모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회선언과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이종찬 기념사업회 이사장의 기념사가 이어졌습니다. 



이종찬 이사장은 그동안 조명하지 못했던 홍범도 장군의 러시아에서의 활동과 자유시 참변, 1937년 강제 이주 이후 카자흐스탄에서의 정착과 역할, 그리고 서거 이후의 평가와 추모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검토하는 이번 학술회의의 의의를 밝혔습니다. 또한, “독립운동의 최고 영웅으로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는 우리 동포사회에서 어떤 역할과 기여를 했는지 조명하길 바란다.” 며 이번 학술회의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습니다.



이어진 추모사에서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평생을 숱한 무장투쟁에 헌신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애국선열들의 위국 정신을 이어받아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사랑 정신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에게 보내는 추모 편지 낭독에서 강정호 대한민국 해군 홍범도함 함장은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그 중심에 있었던 삶과 업적에 대해 되새겼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친 홍범도 장군의 삶과 업적을 거울삼아 국토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제2부. 러시아 동포사회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역할



2부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역할’이라는 대주제와 그 아래, 4개의 소주제로 학술회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효승 기념사업회 국장의 사회로,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 홍웅호 동국대학교 교수, 최영근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인, 맹고군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전 부시장이 발표에 참여했습니다.



제1주제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발표자 :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

제2주제 강제 이주와 카자흐스탄에서의 정착생활 홍범도 장군의 말년은 쓸쓸했다? (발표자 : 홍웅호 동국대학교 교수)

제3주제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인식과 추모사업(발표자 : 최영근 극작가,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인)


포문을 연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 자유시 사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자유시 사변에서 홍범도 장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 발표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제2주제는 고려인의 강제 이주와 홍범도 장군의 카자흐스탄 정착생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홍범도 장군의 말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말년에 그는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쓸쓸히 죽었다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웅호 교수는 이는 우리의 시각을 사실로 규정하는 바람에 잘못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고려인들이 생활고를 겪었고, 수위로서 일하고, 거기에 따라붙는 지원이 생계유지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됐겠지만, 이곳에서의 수위는 생각보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책이었다는 것입니다. 홍웅호 교수는 고려극장은 많은 고려인이 모이는 한인 극장이었고,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 사회의 큰어른으로서 당당하고도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오해는 대한민국에서 ‘수위’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대우가 낮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평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과 시각에 대해 반성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주제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인식과 추모 사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최영근 작가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전우들의 회고록, 연극, 문학작품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서거 이후 지속되었던 추모사업과 묘역 정비 사업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인 후예 대다수가 홍범도 장군을 모르는 현실에 대해서 말하며 그 원인에는 고려인 청년의 민족의식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보훈처 기자단으로서 보훈의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도 강의 시간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평소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러시아 동포 사회에서의 전설이자 리더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학술회의는 기존에 역사  책에서 보던 홍범도 장군을 러시아 동포사회의 큰할아버지라는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3주제에서 언급됐던 고려인 후예 대다수가 홍범도 장군을 모르는 현실은 비단 러시아 동포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청년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이 땅을 위해 목숨 바친 모든 영웅들이 잊히지 않도록 훈남훈녀 기자단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16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만나는 10명의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유관순 열사, 신채호 선생, 박은식 선생,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이 2016 크리스마스 씰에 등장했습니다.

 

2016 크리스마스 씰(출처 :대한결핵협회 홈페이지)

 

대한결핵협회는 매년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모금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조성된 기금은 취약계층 결핵환자 발견, 환자 수용시설 지원, 학생 결핵환자 지원, 결핵 홍보, 결핵균 검사와 연구, 저개발국 결핵사업 지원 등 결핵 퇴치를 위한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하고 있는데요.

 

올해에는 ‘독립을 향한 열망 –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10인’이라는 주제로 크리스마스 씰을 출시하여 본격적으로 모금운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럼 2016 크리스마스 씰에 등장한 독립운동가 10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김구 선생 (출처 :위키백과)

 

먼저, 김구 선생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의사의 의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등을 주도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시절부터 함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활동하며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셨던 분입니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70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나는 일찍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중에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되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글을 남길 정도로 조국 독립에 대한 의지와 소망이 강했던 백범 김구 선생을 떠올리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윤봉길 의사 (출처 :위키백과)

 

두 번째로, 윤봉길 의사는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1932년 일왕의 생일날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파견군 대장 등 일본군 수뇌부를 즉사시켰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를 강화시키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외 거주 한인들을 다시금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할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니 감격스럽다.” 라고 이야기하며 우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이봉창 의사 (출처 :국가보훈처)

 

세 번째는 이봉창 의사입니다. 이봉창 의사 또한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1932년 신년 관병식에 참석한 일왕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을 던졌지만, 거사에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과 이야기를 하면서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거사는 실패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영원한 쾌락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위해 목숨 바친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유관순 열사 (출처 :위키백과)


2016 크리스마스 씰에 있는 네 번째 독립운동가는 유관순 열사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 하였고, 이후 고향에 내려와 충남 아우내 장터에서 4월 1일(음력 3월 1일) 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만세시위 당시 유관순 열사는 부모 유중권과 이소제가 시위 현장에서 살해되는 것을 목격하였음에도, 끝까지 만세시위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또한 독립만세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으면서도 협력자와 시위 가담자를 발설하지 않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중에도 옥안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신채호 선생 (출처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다섯 번째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학자, 언론인으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매진하며 근대 사학의 기초를 확립하신 분입니다.

 

구한 말 장지연 선생의 시일야방성대곡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 선생의 투옥 이후에는 황성신문을 이끌었습니다. 또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을 맡기도 하셨으며 일제에게 우리나라를 빼앗기자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글을 통한 언론활동으로 국민계몽과 애국심 고취에 앞장섰으며, 역사연구가 곧 민족 독립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우리 민족의 역사를 깊게 연구했던 그의 애국심에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박은식 선생 (출처 :네이버캐스트)

 

여섯번째, 박은식 선생도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민족계몽에 앞장섰고, 독립협회에도 가입해 활동하셨습니다. 대동교를 조직해 유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의 공작에 대항하였으며, 신한혁명당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박은식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대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안창호 선생 (출처 :위키백과)

 

일곱 번째는 도산 안창호 선생입니다. 선생은 1902년 미국으로 향한 후 한인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했습니다.


1907년 귀국한 안창호 선생은 민중을 계몽해 실력을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성학교와 태극서관 등을 설립하고 교육 활동에 힘썼습니다.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청년학우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했고, 3•1운동 직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국무총리대리•노동총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 (출처 :안중근의사숭모회)

 

여덟 번째 독립운동가는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를 설립하고 돈의학교를 인수해 인재양성을 위해 힘쓰기도 했으며,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 과정에서도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당당히 밝히며 아래와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의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 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은 아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총성을 울렸던 안중근 의사, 그를 기억하겠습니다.

 

 


홍범도 장군 (출처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아홉 번째 2016 크리스마스 씰에 소개된 독립운동가는 홍범도 장군입니다.


홍범도 장군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일본군을 급습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20명을 사살, 독립군 최대의 승전을 기록하였으며, 청산리 전투에서는 북로군정서 제1연대장으로 참여해 김좌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하였습니다. 이후 항일단체들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김좌진 장군 (출처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크리스마스 씰의 10명의 독립운동가 중 마지막은 김좌진 장군입니다.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면서 성리학적 의리정신과 민족정신을 습득하였습니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거치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 기호흥학회와 호명학교를 설립•국민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했으며, 만주로 넘어간 이후에는 대한군정서 사령관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섰습니다. 1920년 10월 독립군전사에 빛나는 청산리대첩을 이끌었으며, 이후에도 독립군 간부 양성에 힘쓰며 항일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셨습니다.

 

이렇게 크리스마스 씰 속 10명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봤습니다.


크리스마스 씰 뒤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불과 7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제감점기를 겪으며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통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평화와 자유는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글귀처럼 이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재의 평화와 자유를 누리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번 크리스마스 씰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댓글을 달아 주세요

카테고리
카테고리 (4291)
알림-터[소식&공지사항] (342)
국가보훈처 소식 (274)
보훈행사일정 (65)
정책-터[보훈정책] (646)
훈훈한 보훈 정책 (417)
인포그래픽 (66)
카드뉴스 (68)
정책브리핑 (94)
궁금-터[호국보훈이야.. (948)
이달의 독립운동가 (100)
이달의 6·25전쟁 호.. (77)
독립 이야기 (392)
국가 수호 이야기 (136)
민주 이야기 (33)
웹툰 (209)
훈훈-터[온라인기자단] (1866)
훈남훈녀 온라인기자단 (1859)
얻을-터[이벤트&이야기] (479)
훈터 이벤트 (342)
보훈 퀴즈의 신 (135)
금주의 인기 포스트
제71회 보훈퀴즈의신
6.25전쟁 67주년 계기, 미 참전용사와 교포 참전용사 동시 방한
6.25전쟁, 잊을 수 없는 아픈 역사
2018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 추천 접수
국가보훈처 동영상
청년정책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