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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의 전개


오늘은 봉오동 전투 전승 97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1920년 6월 7일,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의 첫 번째 대규모 충돌인 봉오동 전투가 발발하였습니다. 6월 4일 새벽 신민단의 박승길이 지휘하는 30명 가량의 독립군부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문 무렵, 두만강을 건너 귀환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1개 중대 병력과 헌병경찰 중대를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추격에 나섭니다. 이들은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요. 이에 독립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승리를 거뒀으며, 이것이 삼둔자 전투입니다. 독립군을 격파하고자 했던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하자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봉오동 전투 현장(출처: 독립기념관)


삼둔자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은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로 들어가 독립군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일본군은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한 중대의 병력을 포함한 대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변의 온성군에 집결하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에서 승전

일본군이 병력을 재정비하고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온다는 상황을 보고받은 홍범도, 최진동 장군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마을 주민들에게 안전한 곳으로 대피명령을 내린 후 구체적인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해 있는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어오면 일시에 공격하여 적을 격퇴하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6월 7일 오전, 봉오동에 도착한 일본군은 봉오동 골짜기를 수색했지만 독립군이 보이지 않자 독립군 모두 도주한 것으로 착각한 채 매복지점까지 진입했습니다. 


▲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의 공격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신호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사방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가했습니다. 일본군 역시 기관총을 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 밀려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전투가 진행 중이던 4시 40분경 갑작스러운 기상악화로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와 우박과 폭풍이 거세지자, 홍범도 장군은 부대원들에게 퇴각명령을 내렸으며 이 틈을 타 일본군도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은 사령부로부터 철수명령을 받고 황급히 본대로 돌아갔는데요. 

이로써 독립군을 소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일본군은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죠.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전투로 이어지는 전초전을 마련하였습니다.


▲ 봉오동 전투 기록화(출처: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6월 7일, 오늘은 일제에 맞서 조국의 해방을 위해 만주에서 맹활약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처음 충돌하여 대승을 거둔 봉오동 전투가 일어난 지 97주년이 된 역사적인 날입니다.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인 봉오동 전투,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참고 사이트

독립기념관, 제22권 3.1운동 직후 무장투쟁 제 3장 국내진공작전과 봉오동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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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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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5일은 대한민국 무장투쟁사의 가장 빛나는 승리,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전투에서 맹활약한 홍범도 장군이 순국한 날입니다. 대한독립군을 편성, 총사령관으로서 맹활약했던 무장투쟁의 전설 홍범도 장군을 추모하고 그의 삶에 대한 학술적 접근을 위한 추모식 및 학술회의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행사는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과 강정호 대한민국 해군 홍범도함 함장 등 130여 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총 2부로 나뉘어 1부는 추모식을, 2부에는 학술회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제1부. 백두산 호랑이, 날으는 홍범도 장군을 추모합니다.


1부는 홍범도 장군의 추모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회선언과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이종찬 기념사업회 이사장의 기념사가 이어졌습니다. 



이종찬 이사장은 그동안 조명하지 못했던 홍범도 장군의 러시아에서의 활동과 자유시 참변, 1937년 강제 이주 이후 카자흐스탄에서의 정착과 역할, 그리고 서거 이후의 평가와 추모 사업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검토하는 이번 학술회의의 의의를 밝혔습니다. 또한, “독립운동의 최고 영웅으로서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하는 우리 동포사회에서 어떤 역할과 기여를 했는지 조명하길 바란다.” 며 이번 학술회의에 대한 기대감을 표명했습니다.



이어진 추모사에서 구남신 서울북부보훈지청장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등 평생을 숱한 무장투쟁에 헌신한 홍범도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 애국선열들의 위국 정신을 이어받아 그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나라사랑 정신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에게 보내는 추모 편지 낭독에서 강정호 대한민국 해군 홍범도함 함장은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그 중심에 있었던 삶과 업적에 대해 되새겼습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만주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친 홍범도 장군의 삶과 업적을 거울삼아 국토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할 것임을 약속하였습니다.



제2부. 러시아 동포사회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역할



2부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의 홍범도 장군의 역할’이라는 대주제와 그 아래, 4개의 소주제로 학술회의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효승 기념사업회 국장의 사회로,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 홍웅호 동국대학교 교수, 최영근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인, 맹고군 중국 흑룡강성 밀산시 전 부시장이 발표에 참여했습니다.



제1주제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 사변 (발표자 : 윤상원 전북대학교 교수)

제2주제 강제 이주와 카자흐스탄에서의 정착생활 홍범도 장군의 말년은 쓸쓸했다? (발표자 : 홍웅호 동국대학교 교수)

제3주제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인식과 추모사업(발표자 : 최영근 극작가,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인)


포문을 연 첫 주제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최대 비극, 자유시 사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자유시 사변에서 홍범도 장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는 것이 발표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제2주제는 고려인의 강제 이주와 홍범도 장군의 카자흐스탄 정착생활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홍범도 장군의 말년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말년에 그는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쓸쓸히 죽었다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홍웅호 교수는 이는 우리의 시각을 사실로 규정하는 바람에 잘못 알려져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고려인들이 생활고를 겪었고, 수위로서 일하고, 거기에 따라붙는 지원이 생계유지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됐겠지만, 이곳에서의 수위는 생각보다 훌륭하고 존경받는 직책이었다는 것입니다. 홍웅호 교수는 고려극장은 많은 고려인이 모이는 한인 극장이었고, 홍범도 장군은 고려인 사회의 큰어른으로서 당당하고도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이런 오해는 대한민국에서 ‘수위’직책을 맡고 있는 사람들의 대우가 낮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평소 건물을 관리하는 ‘수위’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식과 시각에 대해 반성해야 할 일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주제는 러시아 동포사회에서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인식과 추모 사업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최영근 작가는 고려인들 사이에서 전설로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와 그에 대한 전우들의 회고록, 연극, 문학작품을 소개했습니다. 또한, 서거 이후 지속되었던 추모사업과 묘역 정비 사업에 대한 현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려인 후예 대다수가 홍범도 장군을 모르는 현실에 대해서 말하며 그 원인에는 고려인 청년의 민족의식의 부재에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보훈처 기자단으로서 보훈의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진행된 토론과 질의응답 시간도 강의 시간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평소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러시아 동포 사회에서의 전설이자 리더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홍범도 장군에 대한 학술회의는 기존에 역사  책에서 보던 홍범도 장군을 러시아 동포사회의 큰할아버지라는 새로운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3주제에서 언급됐던 고려인 후예 대다수가 홍범도 장군을 모르는 현실은 비단 러시아 동포사회뿐만 아니라 우리 청년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이 땅을 위해 목숨 바친 모든 영웅들이 잊히지 않도록 훈남훈녀 기자단이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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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대장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 한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날으는 홍범도 장군가 中




안녕하세요 훈터 여러분! 어느덧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6월은 호국보훈의 달로 6•25전쟁, 연평해전 등 가슴 아픈 사건들이 많은 달이지만 그만큼 잊어서 안되는 일들을 다시 한번 상기 시키는 중요한 달 입니다. 하지만 꼭 슬픈 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바로 1920년 6월 7일 중국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이 첫 대승을 거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봉오동전투에서 승리 한지 96년이 지난 오늘, 전승 기념 국민대회가 있다고 하여 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의 시작,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민족기록화 中 (출처 : 에듀넷)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대첩, 대전자령전투와 함께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3대 대첩’으로 불리는 대승을 한 전투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이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했고 그 중심에는 홍범도장군과 같은 의병장,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독립군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신식 무기를 구비 하고 수시로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1920년 6월 7일, 독립군 연합 부대의 본거지인 중국 길림성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과 마주합니다. 

이 날은 전투가 한창일 때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등 유독 기상이변이 심했습니다. 때문에 지형지물을 잘 알고 있는 아군에게도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죠. 그런 와중에도 독립군은 게릴라전으로 일본 정규군과 맞서 적을 토벌하는데 성공했고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시켰습니다. 

이때 노획한 무기와 장비들을 훗날 청산리대첩에 사용되어 또 한번 독립군의 승리를 가져다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승을 통해 만주지역 독립군들의 사기는 올라갔고 대한 독립을 꿈꾸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일본군과 달리 독립군의 피해는 미미 했는데 이런 전투의 중심에는 홍범도 장군의 전술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출신의 한계를 넘어 총사령관으로,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출처 : 국가보훈처)


우당 이회영 선생같은 부유한 집안의 의병장,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홍범도 장군의 출신은 ‘머슴(천민)’ 이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을 거치며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장군은 청소년 시절을 ‘꼴 머슴’ (소에게 먹일 풀은 베어오는 천민)으로 지내면서 지역사회의 아픔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독립운동 초기의 유생, 양반 출신의 의병장들이 민심을 얻지 못한 것과 달리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후 장군은 일제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을 피하며 최초로 산포수 의병대를 조직, 조선독립은 오직 무장투쟁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왜적뿐 아니라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 세력도 가차없이 처단하며 민족의 의기를 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화약류 무기와 게릴라전에 능통했던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이 ‘날으는 장군’이라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서는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만큼 민중의 영웅으로 추앙되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이를 크게 찬양하며 ‘날으는 홍범도 장군가’ 는 이북 지역에 민요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전투 후 장군은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서거하였습니다. 


『봉오동전투 전승 기념 국민대회 현장을 찾아가다』




서울역사박물관내 강당



서울역사박물관내 강당


기념식은 6월 7일 오후 2시, 서울시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진행되었고 습한 날씨 속에도 서울북부보훈지청장, 재향군인회, 시민 등 각계인사 300여명이 자리해 주셨습니다. 올해 기념식은 특별히 장군의 이름을 딴 최정예 필승 잠수함인 홍범도함 진수를 기념하여 함장과 장병들도 초청되었습니다. 식순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봉오동전투 전승 제96주년 기념 국민대회 식순


☆ 개 회

☆ 국민의례

☆ 연혁보고

☆ 기념사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이사장)

☆ 치 사 (서울북부보훈지청장)

☆ 축 사

- 광복회장 (대독)

- 재향군인회장 직무대리

☆ 장군님께 드리는 편지 낭독 (해군 홍범도 함장)

☆ 강 연 (봉오동전투의 역사적 의의)

☆ 축 가 (양지합창단)

☆ 폐 회



출처 : 여천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홍범도장군께 드리는 편지를 낭독하는 홍범도함장 (해군 대령)


“북한의 핵, 미사일 도발 위협과 주변국들의 해양 영토주권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 등은 과거 일제강점기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현존하는 북한의 도발위협을 강력히 억제하고, 앞으로 다가올 잠재적 위협에 슬기롭게 대처 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 소명이라 생각합니다. 홍범도함 또한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펼쳐 일본군을 떨게 하신 “날으는 호랑이, 의병대장 홍범도 장군”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가의 ‘전략적 비수’로서 국가 방위의 중추적 역할을 다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낭독 中

이번 기념식 중 홍범도함장의 편지낭독이 있었습니다. 단순히 애국지사, 호국영웅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그들의 의지를 계속 이어간다는 현실적인 결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다 자세한 기념식의 생생한 현장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영상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의 의지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기념식 만세삼창 中)


어떤 분들은 청산리, 봉오동에서의 전투가 ‘대첩’이라 부를 만큼 큰 규모가 아니라고 합니다. 규모로만 보면 분명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전투로 인해 훗날 일어난 일들은 결코 작다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민족계몽운동 같은 국민들의 ‘정신’을 깨우치는 일도 중요하지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선 누군가의 피와 땀이 필요한 것이 맞습니다. 홍범도 장군, 김좌진 장군 등 많은 무장독립운동가들의 활약으로 실의에 빠진 한반도 국민들에게는 독립이라는 꿈과 희망이 생겼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그 희망의 도화선이 되었고 광복하는 순간까지 일제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도 불사하며 죽어간 용사들의 용기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또한 용사들이 삶으로 보여준 용맹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존 F.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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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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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20 19: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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