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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저항정신의 땅, 광주


안녕하세요, 훈터 독자 여러분. 훈남훈녀 기자단의 남가희 기자입니다.

얼마 전 저는 기사를 통해 찬란했던 5.18 광주와 기념식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신군부의 권력 찬탈을 외면하지 않고 항거했던 광주시민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고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방문한 저는 이 고장이 5.18민주화운동 이전에도 저항정신을 찬란히 빛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광주 곳곳에 남은 역사의 흔적들이 그 사실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저는 광주 저항정신의 시작을 기념하는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으로 향해보았습니다.


▲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위치한 중외공원의 전경


저는 광주 저항 정신의 상징을 만나기 위해 5월의 어느 날, 광주 북구에 위치한 ‘중외공원’으로 향했습니다. 중외공원은 광주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데요, 안락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저는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은 광주시립미술관 뒤편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기념탑은 광주 3.1독립운동의 정신을 오롯이 보여주고자 하는 듯 우뚝 서서 저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광주가 목 놓아 외친 “대한독립만세!”


광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시작되었습니다. 부동교 아래 위치했던 작은 장터를 약 1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가득 메운 광경이 상상되시나요? 수많은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많은 광주 시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숭일고·수피아여고·광주공립농업학교와 같은 학교의 학생들의 역할 또한 중요했습니다.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시위를 독려했고,  주모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습니다.

대한독립만세를 목 놓아 외친 시위대가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무렵, 무장한 일본군의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군중을 제압했습니다. 주동자인 김철, 서정희 선생을 비롯한 시민 100여 명이 피체되면서 시위의 열기는 강제로 꺼져가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인 3월 11일, 광주시민들은 다시금 일어납니다. 숭일고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은 300여 명의 승려들과 합세하여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고 행진했습니다.

이후 3월 13일에도 광주읍의 규모 있는 장날을 계기로 만세시위가 벌어집니다. 이날에도 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3월 16일에는 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이 송정면 송정리 정거장 앞의 광장에서 태극기에 염원을 담아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제중의원의 황상호 등은 ‘조선독립광주신문’을 4호까지 발행하다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 광주의 저항정신을 빛내다


일제의 폭압에 굴하지 않고 강건하게 일어난 광주의 정신을 기리고자, 1986년 11월 28일 중외공원에는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이 건립되었습니다.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에 남겨진 말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습니다.


시민과 학생 수천명이 모여 독립운동가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성난 기마헌병들이 칼을 휘둘렀어도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를 외쳐대며 경찰서 마당까지 행진했다.

…(중략)…

우리는 그 날의 광주만세를 영원토록 기억해

민족의 얼을 삼고자 그 내력을 새겨 이 탑을 세운다. 


탑에 적힌 이 말처럼 3월 10일부터 광주의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장악한 일제에 항거하고, 핍박받는 현실과 싸우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총과 칼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 싸웠던 그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지금의 아름다운 자유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광주를 우리는 빛고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광주에는 어떤 빛이 있고, 광주는 무엇을 빛내는 고장인 걸까요. 저는 그 답이 ‘저항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3.1독립운동 기념탑에서 광주의 3.1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고 다시 바라본 광주는 저항정신을 한없이 찬란히 빛내온 땅이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이번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월 그날의 광주가 ‘광주다웠다’고 표현했는데요, 돌이켜보면 광주는 한결같이 광주다웠습니다. 3.1독립운동으로 저항하며 일어난 광주,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항거한 광주, 5.18 민주화 운동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한 광주...

광주는 언제나 일어나서 저항했습니다. 그러니 훈터 독자 여러분, 광주의 헌신을 기억해주시고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던 1919년 3월 그날의 광주 또한 잊지 말고 가슴에 남겨주세요.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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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개봉한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택시 운전자인 만섭은 서울에서 한 독일인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향합니다. 독일인 기자는 광주를 촬영하게 되는데요. 독일인 기자가 촬영한 것은 바로, 5.18 민주화 운동의 현장이었습니다. 택시 운전사의 실제 이름은 김사복, 독일인 기자의 이름은 위르겐 힌츠페터. 위르겐 힌츠페터는 푸른 눈의 목격자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 뜨거웠던 5.18 민주화 운동의 모습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위르겐 힌츠페터가 목숨을 걸고 취재했던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계엄령 철폐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석방 등에 대한 요구로 시작되었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가두시위와 횃불시위를 진행하며 민주주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때 학생들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의 대학생들은 전남대학교에 모여 시위를 진행합니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 시민들을 무력 진압합니다. 무차별적인 진압에도 불구하고 광주의 시민들은 계속해서 시위를 진행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시민들의 노력에도 5월 27일 2만 5천여 명의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하고 도청에서 항쟁하던 시민들이 모두 연행되면서 5.18 민주화 운동은 마무리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70년대의 지식인 중심의 반독재 운동에서 민중 중심의 민주화 운동으로의 변화를 이끄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연관이 있는 광주제일고등학교, 5.18민주화운동과 관련이 있는 전남도청 구 본관과 국립5.18민주묘지, 5.18광주 민주화운동 기록관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다녀온 여행을 통해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현장, 또 현재와 1980년을 잇는 민주묘지와 기록관에 대해서 알려드리려하니 모두 잘 따라와 주세요!


▲ 광주제일고등학교 전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광주제일고등학교는 광주 북구 누문동에 있습니다. 1920년 광주고등보통학교로 설립되었고 제일고등학교는 1980년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독립운동도 활발히 진행했습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의 학생들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광주제일고등학교 기념탑


▲ 광주제일고등학교 기념관


▲ 김태훈 열사에 대한 안내문 


 교내에 기념관이 있는데 기념관 내에 학생들의 항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있습니다. 현재 학교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26호 광주학생운동발상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전남도청 구 본관


 다음으로 전남도청 구 본관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수많은 시민군이 스러져간 곳이죠. 전남도청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본부 역할을 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도청 앞의 광장인 5.18 민주광장은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하여 전투를 벌였던 가슴 아픈 기억이 서린 곳입니다.


현재 전남도청 구 본관은 등록문화재 16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도청 앞에 있는 금남로와 YMCA 건물, 5.18 민주광장은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민주화 운동의 살아있는 기억이 되었습니다.

당시 본관에서는 전투가 일어났고 부상당한 사람들의 응급처치도 이뤄졌다고 합니다. 현재 전남도청 구 본관과 별관은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 국립5.18민주묘지의 전경


▲ 추모탑


▲ 국립5.18민주묘지의 묘역


 세 번째로, 국립5.18민주묘지는 ‘광주시 북구 민주로 200’에 위치해 있습니다.

민주묘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추모탑입니다. 5.18의 정신이 삼라만상과 우주를 꿰뚫어 범우주적 존재로 승화하라는 염원을 담고 있는 이 탑을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습니다.


▲ 국립5.18민주묘지 기념관 내의 설치물

당시 오월상회 앞에서 항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 국립5.18민주묘지 기념관 내의 설치물

계엄군과 시민군을 표현했다


▲ 위에서 내려오는 빛은 광주 시민들의 눈물을 상징한다.


 한편 국립5.18민주묘지 내에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전시가 있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특히 예술과 접목해 참여하신 분들을 추모하고 있다는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 유네스코 등재 비석


▲ 도청 앞 광장에서 시위하는 사진에 색을 넣은 기념관 내 전시물


▲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 내의 연표


 마지막으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은 ‘광주시 동구 금남로 221’에 위치해 있습니다.

1층 현관에는 당시 총탄에 맞아 깨진 유리가 전시되어 있고, 시민언론으로 기록된 광주항쟁, 민주화를 위해 전진하는 광주시민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 기록관 내의 민주화 운동 관련 보고서


▲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까지의 과정 설명


 2층은 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3층은 다른 나라의 민주화 운동,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매체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층, 5층은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곳이라 바로 6층 전시실로 가면 복원한 윤공희 대주교실이 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는 5.18 사형수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신 분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많은 희생을 통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민주주의를 향한 광주의 뜨거운 외침이 수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의 귓가를 쟁쟁하게 만들 것입니다.


 5월은 아직도 광주 시민들에게 잊을 수 없는 달입니다. 5.18 민주영령 유족들의 시간은 38년 전의 5월에 멈춰 있습니다. 그것은 5.18 민주화 운동이 참 뜨거웠고 아팠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훈터 독자 여러분, 올해 38주년이 된 5.18 민주화 운동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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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26사태 이후 신군부 세력은 12.12 사태를 계기로 사실상 정국을 장악하였고, 집권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억압하였습니다. 하지만 정당성이 취약한 신군부의 일련의 조치들에 국민들은 크게 반발하며, 대규모 시위를 통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습니다.

이에 신군부 세력은 전국의 모든 행정, 입법, 사법을 사실상 자신들이 통제하기 위해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선포하였습니다.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모습 (출처: 국가기록원)


 그러자 5월 18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비상계엄령 확대 조치에 반대하며 거세게 항거했는데, 계엄군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학생들의 요구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학생들의 시위와 항의를 계엄군은 강경하게 폭력으로 진압합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는 차량시위 등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자 21일, 계엄군은 자위권 발동이라는 명분으로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총격을 감행하여, 이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습니다.


▲국립 5.18 민주묘지


“고등학생들은 모두 지금 밖으로 나가라! 우리는 여기에 끝까지 남아 죽음으로써 광주를 지켜 낼 것이지만 너희는 반드시 살아나가서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5월 27일 계엄군이 도청진압적전을 실시하면서, 5.18 민주화 운동은 그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마주하고자 2018년 5월 18일에 저는 광주로 향했습니다. 5월 18일, 그날의 기억에 하늘도 함께 슬퍼하는지 광주의 하늘은 계속해서 비를 뿌렸습니다. 518번 버스를 타고 찾아간 국립 5.18 민주묘지에는 5.18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시민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가두방송을 진행한 전옥주씨가 방송을 재현하고 있다.

(출처: KTV)


“광주시민 여러분! 지금 우리 형제, 자매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집에서 편안하게 주무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도청으로 나오셔서 우리 형제, 자매들을 살려주십쇼.”


기념식은 5.18 당시 가두방송을 통해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한 전옥주씨의 절절한 외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며 5.18 그날의 이야기를 담은, 마치 영화와도 같은 기념식이 막을 올렸습니다.


▲ 이낙연 국무총리가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 및 분향을 하고 있다.


 이번 기념식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각 부처의 장관 등이 참석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은 5.18 희생자의 유가족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광주의 영령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을 약속하며 헌화와 분향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기념식에서 이낙연 국무총리는 “80년 5월, 광주는 광주다웠다.”고 표현했습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5월 15일을 기해 서울의 대학생 시위는 수그러들었지만 광주는 오히려 일어났다.”며 “군 병력을 투입해 진압에 나섰던 신군부를 상대로 무릎 꿇지 않는 곳,  배고픈 시위자에게 주먹밥을 나누었고, 피 흘린 시위자를 위해 헌혈했던 곳, 그 곳이 광주.”라며 민주화를 향한 5월 그날의 광주정신에 깊은 경의를 표했습니다.


▲기념공연 씨네라마 ‘영원한 소년’이 공연되고 있다.


“가족을 잃은 고통은요. 생각보다 크답니다.”


 이후에는 ‘영원한 소년’이 기념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라진 아들 ‘창현이’를 정신없이 찾아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사랑하는 아들을, 딸을 잃은 모든 부모들의 모습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들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창현군의 아버지 이귀복님의 모습을 보며, 5.18 희생영령 유가족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 故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귀복님


 공연 이후 이 극의 실제 주인공인 故 이창현군의 아버지, 이귀복님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8살이었던 아들 창현군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아버지의 굽은 어깨와 수십 년간 아들을 찾아다닌 사연은 보는 이들을 눈물짓게 만들었습니다.

신군부 세력이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는지, 얼마나 많은 시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는지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 故 찰스 헌틀리 목사의 아내 마사 헌틀리 여사가 남편을 향한 편지를 낭독하고 있다.


 이번 기념식에는 당시 목격자였던 故 찰스 베츠 헌틀리 목사의 아내인 마사 헌틀리 여사가 함께 했습니다.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재직했던 찰스 헌틀리 목사는 당시의 참상을 기록하여 해외에 알려 광주의 진실을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찰스 헌틀리 목사는 생전에 광주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념식을 하루 앞둔 지난 17일 광주 양림 선교동산에 헌틀리 목사의 유골 일부가 안장되었습니다.

이날 기념식에서 마사 헌틀리 여사는 먼저 떠난 찰스 헌틀리 목사께 쓰는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광주에서 살았던 11년 동안 광주를 사랑했고 배움을 얻었고

경탄의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5.18 민주화 운동 후에 그 마음들은 더욱더 커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보,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광주는 이제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말대로 우리는 광주를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한편 이 날 기념식에는 내빈과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참석해주셨는데요. 저는 식장에 방문한 고등학생들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영암남구고등학교 2학년 고등학생들입니다.

 

Q. 이 기념식에 참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어요?

A. 학교 역사동아리에서 5.18에 관심 있는 친구들 위주로 기념식 참석 신청을 받았고, 선발되어 왔습니다.

 

Q. 평소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라던가. 알고 있던 사실들이 있었나요?

A. 학교 교과서나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민주화를 위해 많은 분들이 싸우셨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암남구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


Q. 그렇다면 이 기념식에 와서 직접 그날의 기억을 만나보니 어떤 점을 느꼈나요?

A. 사실 책으로 볼 때는 먼 이야기 같아서 잘 와 닿지 않았는데요, 실제로 와서 이 이야기들을 접하다보니 ‘아…아직 얼마 되지 않은 가까운, 잊어서는 안 될 역사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학생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저는 5.18이 멀지 않은, 아직도 그 아픔이 치유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역사임을 깨달았습니다.

기념식 진행 전 방문한 묘역에서 저는 많은 유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유가족 분들이 통곡하고, 망연자실해하고, 낯선 사람들을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는 5.18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지속적인 관심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끝으로 제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막을 내렸습니다. 기념식이 끝난 후 저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곳에서 5.18을 겪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그분들은 저에게 사뭇 담담하게 그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셨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5.18 당시 광주의 모든 시민들이 바로 ‘영웅’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지만, 당시 그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로 나섰던 진정한 ‘영웅’이었습니다.

제가 자유롭고 민주주의가 지켜지는 대한민국에 살게 된 것은 불의와 맞서 싸웠던 이분들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감사하는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이후 어느덧 38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5.18 민주화 운동에서 보았던 민주주의를 향해 온몸을 던진 광주 시민들의 정신을 기려야 합니다. 또 그토록 어렵게 쟁취한 우리의 민주주의를 앞으로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해 나가야합니다.


1980년 5월, 슬프고 찬란했던 그 날의 광주를 잊지 말고 기억합시다. 



*참고자료

국가기록원

k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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