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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송 장덕준 선생


추송 장덕준 선생은 1892년 황해도 재령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명신중학교에 진학, 1911년에 졸업하고 모교 교사로 2년간 일했습니다. 1914년 평양일일신문사에 입사해 조선문 신문부 주간으로 근무하며 조만식, 김동원, 이덕환 등 평양의 주요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는데요. 그러던 중 이듬해 일본 유학길에 올라 세이소쿠(正則) 예비학교에 다니면서 재동경조선인유학생 학우회에 참여하였습니다.


장덕준 선생은 1920년 민간신문인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논설반원과 통신부장, 조사부장을 겸했습니다. 선생은 창간 다음날인 4월 2일자부터 4월 13일자까지「조선소요에 대한 일본여론을 비평함」(필명 ‘추송’)이라는 논설을 통해 ‘조선자치론’과 ‘일시동인론’으로 3.1운동을 왜곡 보도한 일본의 여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장덕준 선생은 동아시아를 방문하는 미국의원단 취재를 위해 1920년 7월말, 특파원으로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그들에게 조선의 독립요구를 알리는데 힘썼습니다.


▲1920년 4월 1일 창간된 동아일보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던 중 1920년 10월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한 ‘경신참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일본군이 청산리에서 독립군에 패한 보복으로, 주민 5천여 명을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학살한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정간처분(발행정지)을 받아 신문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는데요. 장덕준 선생은 ‘신문은 정간 중에 있지만 기자의 활동은 중지할 수 없다’며, 보도할 지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학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10월 중순, 간도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11월 6일 간도에 도착한 장덕준 선생은 간도 용정에 이르러 여관에 여장을 풀고, 일본군 헌병대장을 찾아가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추궁하고 힐책합니다. 일본군측은 당연히 그러한 일이 없다고 부정하면서 후일에 함께 가보자고 약속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 못한 채 여관으로 돌아와 취재 중이던 어느 날 이른 아침, 선생은 일본인 두세 명에 불려 나가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선생은 이날 이후로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간한 독립신문(1921년 10월 28일자)은 「장덕준씨 조난논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선생이 일본군에게 암살당했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29세였습니다.


▲ 장덕준 선생 (출처: 정진석 제공)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또한 한국기자협회는 1971년, ‘기자협회 기장(記章)’을 제정하면서 장덕준선생의 투철한 기자정신을 기리고 본받자는 취지로 기념 메달의 뒷면에 선생의 얼굴을 새겨 넣었습니다.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파 청년지사로서 일본식민통치 아래 최초로 순직한 대한민국 언론인 추송 장덕준 선생. 평생 언론을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외쳤고 일본에 의한 동포 학살의 참극을 세상에 알리고자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던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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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국, 김원범 형제 (사진: 독립기념관)



6월의 독립운동가는 무등산에서 일어나 호남을 호령했던 김원국과 김원범 형제 의병장입니다.


김원국, 김원범은 전라도 광주 출신의 형제 의병장입니다. 형 김원국은 1905년 광산군 송정리에서 일본군을 타살한 후 이듬해 3월 무등산에서 300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동생 김원범은 그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1907년 9월에는 호남의병장의 거목인 기삼연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이어 12월 김준과 합진하여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두게 됩니다.


1908년 7월, 아우 김원범은 전해산 의병장과 함께 대동창의단을 조직하게 되는데요. 김원범은 중군장으로서 영광 불갑산, 장성 동화, 담양 한재, 함평 원야 등 여러 지역에서 활약하였습니다.


같은 해 9월, 형 김원국은 동생 김원범을 따라 선봉장이 되어 100여명을 거느리고 전남 나주, 함평, 광주 어등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습니다.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최후의 호남의병장



그러나 호남의병을 초토화시키려는 일본군의 대대적인 탄압작전은 의병부대를 사방에서 압박하게 됩니다. 1909년 1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광주 어등산 전투에서 조경환 의병장이 전사하고, 아우 김원범은 체포된 후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김원국은 아우가 체포된 이후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대장이 되었고, 나주향교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킨 뜻을 알립니다. 그리고 일본인이 장악한 광주 세무서에 대해서는 『호남의소』의 이름으로 세금을 거두지 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인에게 아부하는 친일파, 일진회원, 밀정 등을 처단한다고 경고하기도 했죠!


이후에도 독립적인 의병부대를 이끌며 광주, 나주, 동복, 창평 등 전라남도 지역에서 적극적인 대일항전을 전개하였고 큰 성과를 거두었죠! 하지만 불갑산 전투에서 부상치료 중 적의 기습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형 김원국은 재판과정에서 동생의 살해에 대한 보복과 국가를 위하여 의병대장이었음을 당당히 밝혔고, 1910년 5월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김원국, 김원범 형제의병장을 각각 1963년과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하였답니다.


전라남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며 일본과 교전하며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김원국, 김원범 의병장!!

나라가 위급할 때 자신을 내던지며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의병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평범한 서민들이였습니다. 수많은 의병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두 형제 의병장과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나라사랑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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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김법린(金法麟) 선생

3.1 운동 범어사 만세운동의 주도자 독립운동가 범산 김법린 선생

 

 

매년 3월이면 돌아오는 대한민국의 국경일 3.1절. 여러분은 3.1일절 하면 어떤 독립운동가가 떠오르시나요? 네~ 대부분 만세운동의 주도자 역할을 했던 유관순 열사를 떠올리실텐데요. 하지만, 우리들이 알게 모르게 3.1 독립만세운동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 중 한 분이 바로 김법린 선생이지요.

 

 

▲ 범산 김법린 선생 (1899 ~ 1964)은 3·1운동 때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 프랑스로 유학하여 피압박민족대회 한국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비밀결사 만당 일본지부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입니다.

 

 

1899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법린 선생은 14세에 출가한 승려였습니다. 그는 1913년 영천 은해사로 출가하여 이듬해 범어사로 승적을 옮겨 신식학교인 명정학교 보습과 및 구학교육인 강원과정을 배웠지요. 이 때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와 독립투사 서상일과의 만남이 후일 조선어학회 활동과 3·1운동에 참여한 동기가 되었답니다.

 

 

 

▲ 국어학자이자 독입운동가 애류 권덕규 (1890 ~ 1950)입니다. 김법린 선생의 스승이었지요.

(출처 : 한국회진흥연구원)

 

 

1917년 김법린 선생은 범어사의 인재양성 책에 힘입어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가 이듬해 불교중앙학림으로 편입하였습니다. 이 시기 한용운 선생이 유심회를 조직하고, 불교잡지 유심지를 발간하자 선생은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였으며, 한용운으로부터 독립 완성에 매진하라는 당부를 받고 동료들과 함께 범어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같이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특파원 자격으로 국내에 파견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시작하였지요.

 

 

▲ 중앙학립의 정문모습 (왼쪽)과 범어사 3·1운동유공비 (오른쪽)입니다. 선생은 중앙학림에서 만해 한용운 선생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지요. (출처 : 독립기념관 http://www.i815.or.kr/html/kr/)

 

 

이후 만주 안동현으로 건너가 국내 독립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며 항일비밀결사 한국민단본부의 기관지인 혁신공보를 발행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밀령에 의하여 한국독립을 위한 사료의 집성과 전달을 주도하고, 승려들을 군사체제로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고자 의용승군을 조직하고 조직체가동을 위해 국내를 오가며 기밀부를 설치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의 검거망이 좁혀져오자 선생은 1920년 4월,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재개하였고, 넓은 안목에서 조국 독립을 모색하고자 유학을 결심하고 1923년 11월, 프랑스 파리대학교(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였습니다. 이후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하여 ‘한국에서 일본제국주의 정책 보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같은해 12월, 반제국주의연맹 총회에서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앞장섰답니다

 

 

 

▲ 김법린 선생이 전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음을 알려주는 1928년 1월 17일자 중외일보.

(출처 : 독립기념관 http://www.i815.or.kr/html/kr/)

 

 

1928년 초, 불교계의 요청으로 귀국한 선생은 강연 및 기고 활동은 물론 조선불교청년회 재건, 조선불교 선교양종 승려대회 개최를 주도하여 일제 사찰령을 부정하는 등 불교계의 자주화를 위해 힘썼고, 학문적 정진을 위하여 일본 유학을 단행하였습니다. 이즈음 국내 불교청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卍黨)이 결성되자, 선생은 만당 일본지부를 결성하고,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 지부장을 맡기도 하였지요.

 

 

▲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운동 전경 (왼쪽). 일본 유학 당시 김법린 선생이 만당의 일본지부 비밀회의 장소 (오른쪽).

 


1932년 3월 귀국 후 교육을 통한 민족자각에 힘쓰던 선생은, 1938년 항일비밀결사체인 만당이 노출되어 진주경찰서에 3개월간 수감되었으며, 범어사로 돌아와 강의를 계속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활동으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45년 1월까지 옥고까지 치렀습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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