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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국가보훈처 제5기 온라인 기자단 이영섭입니다. 저는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호국보훈의 역사와 관련된 곳을 찾아가보는 '지하철을 따라서 알아보는 호국보훈'이라는 연재기사를 쓰려고 합니다. 제 연재기사와 더불어 이전 기자단 선배들이 작성해주신 소중한 기사들을 지하철노선도와 함께 묶어 여러분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는 호국보훈 장소들을 소개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십시오!

 오늘은 제 1편! 3호선 안국역 부근의 '보성사 터'입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그곳. 보성사의 흔적을 찾아가다.>

 

2012년 7월 16일, 비가 오려는지 흐리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6번 출구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종로경찰서를 지나 한국인과 외국인이 반씩 섞여 걷고있는 인사동길의 끝부분을 보면서 안국동 사거리의 신호등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길을 건너 왕복 6차선의 우정국로를 따라 걷다보면 대한민국에서 불국사 다음으로 회자되는 조계사의 일주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조계사의 경내로 들어가 대웅전을 지나서 조계사 교육관을 거쳐 횡단보도도 없는 작은 길을 건너면 녹음에 둘러쌓인 자그마한 공원이 나오고 그 안에 탑 모양의 조형물이 나옵니다. 이곳이 바로 3.1운동 당시에 독립을 위한 민족의 목소리를 대표하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지금은 그 터만 남은 보성사의 흔적입니다.

 

 

 

조계사 바로 옆의 보성사 터의 기념물

 

*기념물의 모양은 독립을 외치는 민중들이 맨위의 독립선언서를 들고있는 형상입니다.
 
3.1 운동 당시에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

 

3.1운동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같은 달 27일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공장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과 같이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극비리에 총 2만1000매의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일본에 협력하던 순사 신승희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보성사의 사장인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천도교의 교주이면서 보성사의 소유주이기도 했던 손병희에게서 받은 5,000원을 주며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쇄가 끝난 선언서를 옮기던 도중 일본경찰의 검문이라는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종일 등은 위험한 순간에 기지를 발휘하여 수레에 있는 것은 인쇄된 족보라고 일본경찰을 속여 독립선언서를 무사히 옮겼습니다. 이렇게 독립선언서는 전국으로 퍼지게 되고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출한 3.1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의 보성사 (출처 : 다음까페 '한음연대)

 

 

보성사의 사주였던 이종일 선생의 상

 

자유를 향한 민족의 외침, 독립선언서
 
보성사에서 극비리에 인쇄된 2만1000매의 독립선언서는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만천하에 선언하기 위한 글이었습니다. 육당 최남선이 작성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의 명월관 지점에서 시인 한용운의 낭독으로 선언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는 1,762자로 되어있으며 조국의 독립을 선언하는 내용과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인도주의적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 독립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독립선언서는 아름답고 뛰어난 문장과 훌륭한 사상적. 문화적 우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압제에 시달리고 있던 우리나라가 독립국이며 이 땅의 국민의 자유민임을 선언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과 주체성을 상징하는 문서이며, 3.1운동 당시의 수많은 한국인들의 독립을 위한 의지를 불태운 우리 민족의 보물입니다.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출처 : 독립기념관)

 

보성사의 역사와 일제에 방화

 

보성사는 1910년 천도교의 기관지를 간행하던 창신사와 보성학원에 속해 있던 보성사 인쇄소가 합병됨으로써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의 인쇄계를 주도하였으며 30평 정도의 2층 기와 벽돌집로 보성학교의 구내에 있었습니다. 이 보성사는 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여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후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조선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하였고, 이에 일본경찰은 보성사를 폐쇄하였습니다. 그러던 1919년 6월 28일, 일본은 보성사에 불을 질러 건물은 전소시켰고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문서를 쉼없이 찍어내던 보성사는 그 터만 남게 되었습니다.

 

 

 

 

▲ 일제에 의해 전소된 보성사 (출처 : 독립기념관)

 

보성사의 터 앞에 서서

 

보성사가 불속으로 사라진지 93년이 지났습니다. 보성사의 사장과 그 직원들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면서, 그리고 조선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자신들의 회사가 일제에 의해 사라질 것을 예견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인쇄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을 하여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등을 인쇄하는데 적극 협력하였더라면 보성사는 살아남아 오늘날 서울의 중심인 세종로나 태평로의 한 가운데에 우뚝 선 커다란 빌딩으로 자라났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폭력과 압제에 시달리던 조국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스스로 불속에 뛰어들었고 오늘날 커다란 빌딩이 아닌 조국 독립을 위한 민족의 인쇄소로 자유민주주의 주권국가인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그 이름을 남겼습니다.

 

보성사가 사운을 걸고 인쇄한 독립선언서에는 이러한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는 도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 내게 되도다, 먼 조상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이로다.'

 

오늘날 우리가 보성사의 터 앞에 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잘 말해주는 한 구절일 것입니다.

 

 

 

 

▲ 보성사 터 기념물 하단의 부조(출처 : 독립기념관)

 

 

<안국역에서 '보성사 터' 가는 길>

 

 

 

▲ 안국역에서 보성사 터 가는 길(출처 : 네이버 지도)

 

-지하철 3호선 안국역 6번 출구로 나와 안국동 사거리에서 조계사 방향으로 향합니다. 조계사 가는 방향에는 불교관련 용품점이 길가에 많으니 찾기 쉬울 것입니다. 조계사 경내로 들어가 조계사를 둘러보시고 반대편으로 나오면 여러 조형물과 함께 녹음이 우거진 공원이 보이실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보성사 터'입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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