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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 망명작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족들은 해방 이후 귀국하여 조용히 지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망국의 책임과 한을 가슴에 묻으며 한 평생 살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경술국치가 일본제국주의의 야욕과 그에 동조한 민족반역자들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국의 황제였던 순종황제는 한일강제병합에 끝까지 친필서명을 하지 않음으로 한일강제병합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다루게 될 기사 역시, 대한제국의 황실이 한일강제병합에 동의하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사건을 다루려고 합니다. 바로 ‘의친왕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 시도’입니다.

 

 

 

의친왕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경술국치 이후, 황족 중에는 폐위되어 창덕궁에서 거처하던 순종 황제, 일본의 볼모로 잡혀가 일본의 침략전쟁에 강제로 참가해야했던 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그리고 역시 일본의 볼모로 일본으로 간 덕혜옹주 외에 의친왕이 있었습니다. 의친왕은 대한제국 특사자격으로 유럽을 방문하였고, 미국에서 5년을 유학하면서 국제적 시각을 갖추어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그는 독립의지가 유달리 강했습니다. 1919년 11월에 추진되었던 제 2차 독립만세운동 선언서에는 의친왕이 이강의 이름으로 참여하였고, 1921년 미국에서 5대열강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을 촉구하는 건의서에 황족대표로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이러한 의친왕의 높은 독립의지 때문에 망명을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안창호, 비밀공작원이었던 이종욱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이종욱에게 의친왕을 상해에 있는 임시정부로 망명시킬 계획을 꾸미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종욱은 이후 몇몇 사람들을 모아, 의친왕 망명작전을 위해 모의를 했습니다. 작전을 계획한 이종욱은 전협 외 소규모의 사람들과 의친왕 망명 작전을 시작하였습니다. 일제경찰을 따돌린 의친왕은 이종욱 일행을 만나고, 그 자리에서 상해망명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제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수염을 붙이고 중절모자를 쓰는 등 변장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제경찰은 의친왕이 사라진 소식을 접하고 신의주, 부산 등 국경 및 국외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곳부터 형사들을 총 출동시켰다고 합니다. 하지만, 기차에서도 한 차례 검문의 위기를 넘긴 의친왕은 결국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역 (지금의 단둥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안동역에도 일제는 수사망을 좁혔고, 안동역 부근에서 의친왕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던 일본 경찰이 의친왕을 발견하게 됩니다.

 

황족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망명 사건이 갖는 의미.

 

 

 

1915년 창덕궁 인정전에서 찍은 대한제국 황실 가족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덕혜옹주, 영친왕, 고종, 순종효황후 윤대비, 덕인당 김비, 이건 출처:2004년 4월 가수 이석씨가 공개

 

 

사실 황족의 망명 시도는 의친왕 이외에 여러 건 있었습니다.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이 고종 전 황제를 해외로 망명시키려 했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황태자 영친왕을 망명시키려 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황족들의 이러한 해외로의 망명시도는 대한제국의 황실이 한일강제병합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과 독립운동에 꾸준히 참여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족들이 망명함으로써, 국내외의 이목을 놀라게 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 세력을 더욱 결집시키는 동시에, 독립자금 모집에도 훨씬 수월해졌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황족들이 홀로 외롭게 시간을 보내다 생을 마감한 것은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작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합니다.

 

의친왕은 망명작전 실패 이후 임시정부로 보낸 친서를 보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임시정부에 합류해서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동시에 조국의 독립과 세계평화에 헌신하겠다.’ 비록 망명시도가 좌절되었지만, 의친왕은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를 열망하였다는 것을 친서를 통해 다시 한번 강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1940년 시행된 일제의 창씨개명에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비록 의친왕은 망국의 황족이었지만, 우리민족의 황족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노력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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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알바 .

    2017.12.02 15: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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