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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안동시 법흥동에 위치한 고성이씨 종택 임청각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생가로, 이상룡선생과 아우 이상동, 이봉희 형제, 그의 아들 이준형, 조카 이형국, 이운형, 이광민, 손자 이병화, 당숙 이승화 까지.

대일항쟁기, 삼대에 걸쳐 뜨거운 독립운동을 활발히 펼친 독립운동가 9인을 낳은 곳입니다.





임청각은 본채와 군자정,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본채는 바깥쪽 행랑채와 가장 위쪽 사랑채를 포함한 다양한 용도의 방들이 있고, 군자정은 대청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출된 석가래가 멋스럽고 들창문을 들어 올리면 낙동강이 바로 보이는 구조이지만 지금은 철길과 방음벽이 가로막고 있어 그 풍광을 잃었습니다. 





군자정 옆으로 높은 언덕에는 사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대대로 명문가로서 명맥을 이어온 고성이씨 집안의 종택 임청각 사당에는 조상의 위패가 없습니다.


나라를 잃을 위기에 처했을 때 석주 이상룡 선생은 “공자,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라는 말을 남기고 경술국치 후 구국의 일념으로 만주 망명길에 오르기 전 조상들의 신주를 땅에 묻었습니다. 유서 깊은 명문가의 종손으로서 일제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가 내린 결단은 당시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석주 이상룡선생은 일생을 구국운동에 헌신하고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명가의 후예이자 정통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다가 1896년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표에 항거하여 외숙인 권세연이 일으킨 의병에 참진하면서 독립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섰습니다.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설립하여 애국강연, 회보발간 등을 통한 자강운동을 펼쳤으며 1911년 1월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일가를 거느린 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 기지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주민의 자치단체 경학사를 조직하여 이주민이 경제적 안정과 법적 지위 보장 등에 힘쓰는 한편 신흥강습소를 세워 군사교육을 통한 조국광복의 전위대를 이루는 독립군 양성에 착수하였습니다.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변천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를 이루어 갔고, 신흥강습소는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여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독립군 장병들을 길러냈습니다.

또한 그는 끊임없이 독립운동단체의 대동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곧추세우고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활력과 연대감을 불어넣기 위해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했습니다. 하지만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자 그는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간도로 돌아와 전민족유일당 결성을 위해 만주지역의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삼부 통합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50여년에 걸친 선생의 일관된 구국노력은 의병, 계몽운동, 독립군 등 당시 가능한 모든 독립운동 방안을 섭렵한 것이었고 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 석주 이상룡 선생.



그의 아들 이준형은 1930년대에 일제치하에서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다며 호적을 거부했으며 이로 인해 이준형 부자는 일제가 새로 도입한 등기제도에 따라 임청각의 소유권을 상실했습니다. 이준형은 일제의 협박을 피해 다니다 국운을 비관하고 일제에 항거해 자결했습니다. 아우 이상동은 독립운동 중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사망했고 아우 이봉희는 신흥무관학교 교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습니다. 조카 이광민은 독립운동으로 얻은 오랜 병고로 만주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조카 이운형과 이형국 역시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르다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또한 손자 이병화는 일본경찰 사살혐의로 옥고를 치르다 47세 사망했으며 당숙 이승화 역시 일제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에서 항일투쟁 중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배출한 임청각 역시 일제의 비인간적이며 비상식적인 탄압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배산임수 지역에 위치해 당시 방 99칸을 가진 최고 규모의 목조 대저택이였던 임청각. 일제가 독립운동가 9인을 낳은 곳이라 그 정기를 끊어버리겠다며 중앙선 철도가 종택 앞으로 개설되면서 강제 철거돼 현재 50여 칸만 남은 상태로 규모도 절반이상 축소되었습니다. 광복 후에는 철도 선로반원들의 합숙소로 쓰이며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도로 옆 철도 밑으로 난 작은 통로를 따라 들어서면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건축물로 칭송받았던 임청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협소한 외부와 허름한 대문을 가진 임청각과 천막으로 싸여져 철도 바로 옆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하고 있는 법흥사지7층전탑이 보입니다. 제가 갔을 당시 법흥사지7층전탑은 복원중이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 제16호 법흥사지7층전탑은 일제에서 보수를 명목으로 콘크리트칠을 한 탓에 복원이 더욱 힘든 상황입니다. 열차 굉음과 진동이 하루 종일 임청각을 괴롭힙니다. 임청각의 기와가 붉은 색을 띄는데 이는 바로 옆 기찻길에서 날아온 철가루에 녹이 슨 것입니다.



임청각 주변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아파 할 훈터 가족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요. 다행스럽게도 임청각을 비롯한 탑골 일대가 복선전철화사업으로 완전히 복원될 기회를 맞았습니다. 오는 2018년이면 철길이 이전되고 임청각 설계도가 고문서에 남아 있어 헐렸던 50칸을 복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사대에 걸쳐 독립운동의 시작부터 끝까지.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명문가로서의 삶을 버리고 당당하고 담대하게 독립투사로 평생을 살았던 그들.
그들을 낳고, 그 비통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임청각.

 

우리의 아름다운 보물 182호의 임청각과 그곳에서 자라난 9분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 주세요.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매일신문 2012년 6월 6일자  [古宅은 살아있다] <23>안동 고성 이씨 임청각·귀래정




               

Posted by 대한민국 훈남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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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영돈

    2015.07.18 16:0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진에나오는곳이 임청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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